원대연 제일모직 패션부문 사장(57)은 일주일 중 이틀은 ‘사장님’ 대신 ‘학장님’으로 불린다. 그의 명함에 ‘SADI(Samsung art design institute) 학장’이라는 직함을 하나 더 넣은 것은 지난해 4월부터다.월요일과 목요일은 아예 서울 종로구 본사가 아닌 강남구 SADI 학장실로 곧장 출근한다. 평소에도 SADI의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그의 어깨가 더욱 딱딱해진 것은 물론이다.그렇지만 원사장은 SADI 학장 직무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가끔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회사보다 SADI 홍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다. 학생들 자랑도 침이 마르도록 한다.예컨대 올해 졸업한 19명 중 18명이 취업하고, 나머지 1명은 제일모직 인턴사원으로 채용했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또 2학년 과정을 마친 학생들 중 60%가 미국 파슨스 등 유명대학으로 유학을 가고 있기에 오래지 않아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디자이너들이 나올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기대감에 부풀어 얼굴에 홍조마저 띤다.SADI는 1995년 이건희 삼성회장이 ‘21세기 경쟁력은 디자인’이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 뒤 설립된 디자인전문학원. 미국 파슨스의 시스템과 커리큘럼을 로열티를 주고 도입, 국내 최고의 디자인전문학원을 꿈꿨으나 그간 기대했던 결실을 맺지 못했다.무엇보다 학벌이 중시되는 사회분위기에서 전문학원을 찾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 이러다 보니 뚜렷한 비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거듭했다.삼성은 결국 원사장에게 구원투수 역할을 맡겼다. 기존에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지사, 에스에스패션 등 시들어가는 사업장을 다시 살리는 데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데다 삼성의 패션사업을 꽃피우게 한 그를 적임자로 여긴 것.원사장은 이런 기대에 걸맞게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SADI를 정상화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처음 부임해 보니 교수진과 학생들 모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어요. 사정을 알아보니 학교의 방향을 놓고 옥신각신하더군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한편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지요. 조직은 한 방향을 갖고 팀플레이를 펼칠 때 성공할 수 있거든요.”우선 학생들의 진로고민 해결에 주력했다. 해외유학길을 넓히고 졸업생들의 100% 취업을 보장했다. SADI의 교육시스템은 2년 수료과정과 3년 졸업과정이 있다. 2년 수료과정은 영어능력 및 실기 등에 우수한 실력을 갖춘 학생들이 파슨스 등 미국과 영국의 8개 대학에 편입학해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현재 60%의 학생이 2년 과정을 수료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른다고 한다. 또 3학년 졸업생들도 영국 미들섹스 등의 학교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아울러 3학년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기존의 70% 정도에서 100%로 끌어올렸다. 만약에 취업을 못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 제일모직을 비롯해 삼성그룹 계열사에 1년간 인턴사원으로 채용하도록 했다. 장학금도 대폭 늘려 이전의 25% 수준에서 지금은 약 60%의 학생이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학생 1인당 수혜금액이 약 84만원에 달한다.신입생 선발기준도 학교성적보다 ‘디자인에 대한 애정과 끼’를 중시했다.“성적위주의 선발은 일반대학과 차별화를 꾀할 수 없습니다. 정말 디자인을 사랑하고 끼를 갖고 있는 학생들이 최적의 조건에서 공부해야 우수한 디자이너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론뿐만 아니라 실무교육 비중도 대폭 늘렸다. 이를 위해 교수진도 최소한 3년 이상의 실무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뽑았다.비전도 새로 만들었다. 그동안 학위 인정대학으로 가야 한다, 전문대학원으로 가야 한다는 등의 내부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 “기존 대학과 비슷한 방향으로 가면 SADI를 설립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2010년 국내 최고 명문디자인학교를, 30주년을 맞는 2025년에 세계 명문학교로 진입한다는 목표를 정했습니다.”그러나 과연 학벌위주의 사회환경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SADI를 찾을까. 원사장도 이 점이 고민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최근 입학생들의 50% 이상이 대학재학생이거나 졸업생들이라며 사정은 점차 나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유럽의 경우 대학졸업생이 아닌 학원 출신들이 업계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SADI 등 학원 출신들이 차츰 패션회사의 중추로 자리잡게 되면 기존 인식이 바뀔 것이라고 봅니다.”사실 원사장의 SADI 사랑은 디자인 사랑에서 나왔다. 그는 늘 ‘디자인이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온 CEO 중 한 명이다. 새로 채용한 디자이너들을 1년 6개월간 혹독한 실무교육을 시킨 뒤 일을 맡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그의 꿈은 세계적 브랜드력을 갖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디자인하우스(법인)를 설립했고, 2004년에는 미국 뉴욕에도 같은 성격의 디자인하우스를 설립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조만간 일본이 중량급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세계적인 브랜드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귀띔했다.“제가 워낙 패션을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일이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패션업계가 선진국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합니다. 우수한 디자이너의 양성체계를 갖추고 해외진출도 활발히 할 때 우리나라의 패션 수준이 세계적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고 봅니다.”원사장이 SADI에 정력을 쏟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약력 : 1946년 생. 64년 동아고교 졸업. 69년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69년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73년 삼성물산 봉제수출과. 80년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지사장.90년 삼성물산 의류부문장(상무이사). 92년 삼성물산 구주지역본부장. 93년 제일모직 의류사업본부장(전무이사). 96년 삼성물산 대표이사 부사장. 99년 제일모직 사장(패션부문). 2002년 4월 SADI 학장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