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의 백궁 정자지구, 목동 주상복합지까지 금융사들간 유치전 치열

지난 4월 중순. 시중 모 은행 부행장실 지휘 아래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첩보전이 진행됐다. 특명은 ‘경쟁은행이 입찰가를 얼마 써낼지 알아내기’. 관계 직원들은 가능한 인맥을 총동원해 정보를 얻으려고 애를 썼고 경쟁은행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물밑신경전이 벌어졌다.이는 서울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 있는 ‘우성리빙텔’이라는 건물 1층 공개매각을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분양면적 222평짜리 이 1층 사무실은 은행 프라이빗 뱅킹(PB) 점포가 들어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입지다.이 자리를 PB점포용으로 찍어둔 하나, 우리은행을 비롯해 모두 6개 개인과 법인이 입찰에 응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이없는 승부로 끝났다.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은행들을 제치고 한 건축설계사사무소가 낙찰을 받은 것.낙찰가는 105억원이었다. 하나은행 점포개발팀에 따르면 이 공간의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는 70여억원으로 판단됐고, 아무리 탐나는 점포라고 해도 그보다 훨씬 높은 값을 써내는 건 무리였다.은행들은 이제 이 공간의 새 주인에게 점포를 임대하려고 다시 2라운드 경쟁에 돌입, 눈치작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어느 은행이 이곳에 간판을 올릴 수 있게 될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크게 대단할 것 없는 조그만 빌딩이 이처럼 귀하신 몸이 된 것은 환상적인 입지와 희소성 때문이다. 인근 타워팰리스 권역 내에서 이 장소가 은행 점포가 입주 가능한 거의 유일한 자리. 인근에 있는 삼성타워팰리스부동산의 중개인은 “주변에 워낙 비슷한 자리가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했다.사실 이 우성리빙텔을 둘러싼 해프닝은 ‘2차 도곡대첩’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지난해 타워팰리스 분양이 진행될 때 PB센터를 내기 위해 모든 금융사들이 몰려들어 한판 전쟁을 치렀다. 1차전 승자는 국민은행.신한, 제일, 하나 등 6개 금융사와의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요지인 타워팰리스타운 내 삼성 ENG빌딩에 입주했다. 모 은행 관계자는 “국민은행이 예상되던 값의 두 배를 써냈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어쨌든 타워팰리스 안이 아니더라도 인근에는 이미 거의 모든 금융사들의 PB형 점포가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기업은행은 타워팰리스에, 하나은행은 인근 대림아크로빌에, 신한은행은 타워팰리스단지 옆 그랑프리상가에, 외환은행은 LG투자증권 도곡점으로 자리를 잡았다.어째서 엄청난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꼭 이 자리가 아니면 안된다”며 금융사끼리 특정장소에서 격전을 벌이는 것일까. 관계자들은 ‘PB점포가 들어설 만한 입지조건을 충족시키는 장소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급스러운 PB점포가 들어서려면 첫째는 부유층들이 밀집해 있어야 하고, 둘째 200평 이상, 셋째 접근이 편하며, 넷째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스러움이 있는 빌딩 등 최소한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기본 사양’ 외에도 따라붙는 옵션들이 있다.같은 건물에 외제 자동차 대리점이나 고급 음식점이 함께 있으면 금상첨화이며, 부자들은 화려한 것을 원하면서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것을 꺼리는 편이라 건물이 찾기 쉬우면서도 적당히 안쪽에 있어야 한다. 심지어 빌딩이름도 중요하다.‘도곡 PB대첩’으로 상징되는 이런 치열한 경쟁은 강남과 분당권의 입주예정인 대형 고급 주상복합단지들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옛 삼풍백화점 자리에 들어서는 주상복합 아크로비스타.내년에 서초 교대지역 법조타운의 부유층들이 대거 입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곳도 PB영업을 위해서는 놓칠 수 없는 지역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곳 아크로비스타 상가 내에 은행 PB점포를 열 만한 공간은 딱 한 곳, 증권사 점포로 가능할 만한 자리도 역시 단 한 곳뿐이라는 게 문제다.상가분양을 대행하고 있는 부동산개발업체측은 “거의 모든 시중은행과 증권사에서 문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업체와 접촉해 보았다는 한 증권사 관계자는 “분양업체가 수의계약을 원하는 것 같다”면서 “그러면 무조건 값을 높게 써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고 말해 또 한 번 치열한 물밑경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케 했다.강남지역은 이미 PB영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은행과 증권사들의 공인된 전쟁터다. 하나은행 PB지원팀 관계자는 “엄청난 임대료를 내야 하고 시설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단일지점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그러나 은행 입장에서는 도곡동 서초역 등의 상징성을 고려, 무슨 수를 써서든 선점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우량고객 발굴은 쉽지 않은 일인데, 부자고객이 떼를 지어 사는 대형 주상복합은 일단 선점만 해 놓으면 그 효과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이다.강남뿐만 아니라 대형 주상복합 입주가 러시를 이루는 분당의 백궁 정자지구와, 목동 주상복합 밀집지역도 금융사들의 PB영업 전략적 요충지에 속한다. 백궁지구의 경우 주상복합아파트 및 오피스텔 14개 단지 1만2,000여가구가 지난 2월부터 일부 입주를 시작으로 2005년까지 꾸준히 입주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파크뷰에는 기업은행이, 아이스페이스에는 신한은행이, 쉐르빌에는 하나은행 등이 분양을 받았거나 임차계약을 끝낸 상태다.앞다퉈 야심차게 PB를 시작한 은행들은 초기에 “입지보다 차별화된 서비스가 중요하다” “어차피 부유층 고객은 점포가 집에서 가까운지 먼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점포입지의 중요성에 대해 이견이 없고, 특히 강남에서 모든 승부가 결정된다는 게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또 한편으로는 “요즘 가계부채와 카드부실에다 SK글로벌 사태까지 겹쳐 은행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부자들을 대상으로 화려한 점포 내기에 여념이 없다는 게 사회적으로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라며 가급적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이렇게 좁은 시장에서 과열양상마저 보이는 경쟁을 하다 보니 부작용도 적잖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은행끼리 경쟁을 하는 사이 부동산컨설팅 등 중개인들이 끼어들어 중간에서 가격만 한없이 올려 받고 있다”면서 “금융사들이 점점 더 많은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초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