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콜센터·전화녹취기·가스경보기 등 히 트… 올해 550억원 매출 기대

부양텔콤의 진녕도 사장(41)은 어려서부터 가전제품을 뜯고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중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함께 개천을 사이에 두고 고물상이 몰려 있는 부산의 조방으로 달려가는 게 일이었다. 이곳에서 모은 용돈으로 고물 라디오나 오디오 등을 사서 뜯어보거나 조립해보았다. 고물을 산 날이면 날밤을 샜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공차는 것보다 좋았어요.”진사장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성공고에 입학했다. 기술을 배워 직접 라디오나 오디오 등을 만들어보고 싶어서였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진사장은 전문대를 졸업한 87년에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그의 소망대로 생산기술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오디오 시제품을 테스트하는 일을 맡았다.“신입사원에게는 관리할 모델을 맡기지 않아 허드렛일만 했습니다. 얼마 후 입사선배에게 관리할 모델 하나만 달라고 졸랐지요.” 선배는 그의 행동을 밉잖게 보았던지 모델 한 개를 떼어줬다. 그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휴일도 없이 준비했다.얼마 후 불량률 제로(0)라는 경이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초기 테스트과정에서 40~50%의 불량률이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신입사원이 모델을 맡았다는 데 대해 질책을 가하려 했던 담당부장은 불량률이 제로라는 사실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불량률 제로에는 그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조립부문별 베테랑을 선정해 저녁을 사며 협조를 부탁하고 60여명의 조립직원을 중간중간에 배치해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이를 통해 진사장은 회사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다. 입사 6개월 만에 10여개의 모델을 관리하는 팀장으로 파격승진을 했다. 2년 후에는 인쇄회로기판에 칩을 자동으로 앉히는 SMT부문의 최고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해외에 파견돼 현지 애프터서비스맨들을 대상으로 기술교육도 했다. 한창 잘나가던 진사장은 SMT가 향후 사업성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92년 3월 퇴사했다.하지만 사업진행은 계획보다 조금 늦었다. “삼성전자에서 나오자 SMT를 하는 중소기업 사장이 찾아와 기술지도를 원한다며 입사를 간곡히 요청해 왔습니다. 그래서 5개월 남짓 직장생활을 더했습니다.”사업이 목표였던 진사장은 그해 10월 경기도 화성에 조립식 건물을 임대해 SMT사업을 시작했다. 1억3,000만원짜리 중고기계를 계약금 2,600만원을 주고 나머지는 3년 할부로 구입했다. 5명으로 시작해 그해 석 달 동안 12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무턱대고 LG전자에 찾아가 졸라서 따낸 물량이었습니다.”이듬해에는 수주물량이 없어 고생을 했다.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계수표(7,600만원)를 빌려간 친구가 94년 4월 부도를 내는 바람에 이를 막느라 허덕였다. 그러면서도 생산량은 조금씩 늘어갔다.그는 95년 초 삼성전자가 반쯤 고장난 SMT설비를 헐값에 판다는 얘기를 듣고 단걸음에 달려가 샀다. 공장으로 옮긴 그는 보름 동안 기계를 고치며 공장에서 지냈다. “한겨울이라 찬바람 때문에 얼굴이 얼고 손이 터 피가 나더라고요.직원들과 라면을 끓여먹으며 고장난 기계를 손봤어요.” 그는 기계를 들여놓으면서 가족들은 부모님이 있는 부산으로 보냈다. “굶길 것 같아 그랬다”며 진사장은 눈시울을 붉혔다.1995년 2월 말 시운전에 들어갔다. 주문량이 꾸준히 늘면서 매월 4,000여만원의 순이익을 냈다. 하지만 겨울의 찬바람은 매서웠다. 주요 납품처인 삼성전자가 수원시에서 구미시로 사업부를 이전하면서 물량이 끊긴 것. 월급을 줄 수가 없었다. 20여명이던 직원은 4명으로 줄었다. “매월 적자에 시달려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그는 술회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든가. 진사장에게 97년 초 행운이 찾아왔다. 창업하기 전 잠깐 다닌 직장의 부하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삼성전기 연구실로 직장을 옮겼다며 “카오디용 데크 샘플 인쇄회로기판(PCB)을 50장만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존 거래처에 부탁했는데 물량이 적다며 거절당했다”는 설명을 했다.진사장은 놀리던 기계도 있고 해서 당장 작업을 했다. 2~3개월 동안 원가만 받고 삼성전기 연구실에 샘플을 만들어줬다. 행운은 이렇게 시작됐다. 삼성전기가 감사의 표시로 키보드 물량을 진사장에게 준 것이다. 생산규모가 커지면서 공장을 수원으로 확장 이전하고 직원도 다시 늘렸다.진사장과 삼성전기가 끈끈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지난 97년 5월쯤이다. 삼성전기측에서 한 달 물량의 키보드를 일주일 만에 납품해야 할 급박한 일이 생겼다며 생산을 요청해 왔다. 불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진사장은 직원을 늘리고 일주일 동안 밤을 꼬박 새워가며 깔끔하게 처리했다. 삼성전기는 “진사장 덕에 대과 없이 처리했다”며 휴대전화용 키패드 물량을 주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용 키패드는 스피커 마이크 볼륨 키단자 부저가 집합된 인쇄회로기판을 일컫는다.“그해 매출 96억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겨우 10억원을 넘기는 정도였는데….”진사장은 삼성전기로부터 물량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매출이 급증,98년 200억원,99년 402억원으로 매출이 확대됐다. 그러면서 공장도 건평 800평 규모로 확장하고 직원도 270명까지 늘었다.“2000년 휴대전화단말기보조금이 없어지면서 휴대전화 판매가 격감하자 키패드 납품물량이 줄어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매출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자체 상품이 없으면 외풍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진사장은 연구개발에 들어가 5개월 만인 2001년4월 보이스레코더를 출시했다. 이후 이탈리아 라이프텔레콤사에 DECT무선전화기(유럽형 가정용 전화기)를 수주받아 2001년부터 연간 30만대씩 공급하기 시작했다. “계약 당시 라이프텔레콤사 사장이 직접 오고 엔지니어를 보내 3개월간 실사를 하는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쳤습니다.”사세가 커지면서 진사장은 지난해 고객정보관리시스템을 연구, 개발하는 누림텍을 인수했다. 그러면서 독자상품(브랜드명 BOOYANG)을 잇달아 출시했다. 미니콜센터, 텔레코더, 전화녹취기, 가스경보기, 고객정보관리시스템 등이 부양텔콤의 인기상품들이다 .진사장은 올 6월 들어 액정표시장치(LCD)모듈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매월 30만개를 생산해 공급할 계획이다. 진사장은 “올해 LCD모듈분야에서의 매출신장으로 550억원의 매출을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031-202-9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