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지난 7월10일 콜금리를 또 인하했다. 2분기 경기가 1분기보다 더 나빠지고 있고 전망도 잘 보이지 않으니 금리를 다시 내려서라도 주저앉는 경기를 붙잡아 보자는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한은의 전망으로도 올해 잘해야 3%선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된다는 것이고 보면 사태는 매우 심각한 모양이다.문제는 한은이 금리를 내릴 때마다 경제성장률이며 예상 실업률이며 물가 전망치를 너무도 쉽게 지우개로 고쳐서 다시 내놓는다는 점이다. 경기가 워낙 들쭉날쭉하니 한은의 전문가들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명색이 중앙은행인 한은의 경기예측 능력이 이다지도 허약하대서야 될 말이 아니다.한은은 지난 연말만 해도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7%로 자신만만하게 내놓았으나 지난 4월 4.1%로 한차례 낮추었고 7월 금리인하 과정에서 다시 3.1%로 떨어뜨렸다. 문제는 경기 전망의 수정치고는 너무도 큰 폭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숫자를 고치더라도 미세한 조정이라면 또 모를까 지난 4월에는 1.6%포인트, 이번에는 1%포인트나 무지막지하게 끌어내렸다. 5.7%라면 호황이라고 할 만하고 4%라면 ‘그럭저럭’이라고 해야 할 것이지만 3%라면 말 그대로 침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소수점 단위의 미세한 수정이 아니라 이건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고 할 만큼 편차가 크다. 이 정도의 수정이라면 ‘수정’이라기보다는 전혀 새로운 숫자라고 해야 옳다.한은은 500여명의 정예 이코노미스트를 거느린 최대 연구기관임을 늘 자랑해 왔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어떤 경제연구기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전문가를 확보하고 있으며 또 각종 자료를 취합할 수 있는 ‘법적 권한’까지 갖고 있다. 그런 기관의 예측치로는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왜 한은의 예측이 이다지도 허약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원천자료가 취합되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은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자료가 가공되고 판단하는 절차를 거치면서 굴절현상이 나타날 위험성이 더욱 크다.한은 집행부건 금통위건 아니면 총재가 특정한 편견을 고집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있고 이것이 판단과정에 개입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지난 3월 모 금통위원이 “경기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요지로 발언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당시에도 문제가 됐던 이 금통위원의 발언은 경기침체를 경고하는 온갖 수치들이며 전망치들을 음험하게 보는 정치권력의 바람 앞에 내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언론의 봉쇄요, 입을 틀어막는 것이다.경기판단조차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한은의 존립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숫자를 다루는 사람이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힌다면, 그리고 금통위원이나 한은 총재가 권력의 입김으로 조직의 분위기를 잡아간다면 숫자는 그 냉정성과 명징성을 잃게 된다.한은의 독립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부로부터의 외형적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으로부터, 다시 말해 진정 자신 내부의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외형상의 독립도 공염불이 되고 만다.지금 국회에서는 한은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한은측은 목이 터져라 독립투쟁을 외치는 형국이고, 정부는 무언가 뒷다리라도 잡아둘 묘안을 짜내기에 급급한 것 같다. 합의를 본 것이라면 금통위원 자리를 한은과 재경부가 나눠 갖는 정도라고 하겠는데 이런 것과 한은의 독립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은 스스로가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모든 것이 모래성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