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 춰선 공장, 1분기에만 자동차 100만 대 생산 차질…미·중 갈등에 자연재해 등 겹쳐

[스페셜 리포트]

전 세계 자동차 공장이 멈췄다. 자동차의 주요 부품인 차량용 반도체의 품귀 현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반도체 공급난이 가전과 스마트폰 등 타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다. 수요 증가에 공급 업체의 몸값이 뛴 것은 물론이다. 전 세계가 파운드리(위탁 생산)를 주목하고 나섰다. 미국과 유럽은 파운드리가 아시아에 편중돼 있다며 자국 내에 자체 공장을 짓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그 배경엔 G2 간 패권 경쟁이 숨어 있다. ‘산업의 쌀’을 넘어 ‘국가 안보’가 된 반도체, 열강의 반도체 패권 경쟁 그 중심에 선 ‘반도체 코리아’를 조명했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8일부터 16일까지 평택공장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다.” (4월 8일 쌍용차 전자공시)

턱밑까지 차올랐다. 지난해 말부터 독일의 폭스바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일본의 혼다 등 세계 완성차 업체들이 차량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공장 가동을 멈추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완성차업계는 반도체 재고를 쌓아둔 덕에 세계적 대란을 비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 한국 완성차업계에도 반도체 수급 대란이 번졌다. 쌍용차는 4월 8일 생산 중단의 이유로 ‘자동차 반도체 소자 부품 수급 차질’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또한 4월 14일까지 울산1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고 한국GM은 이미 부평2공장 가동률을 50%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은 코로나19가 터진 작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자동차 판매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한 완성차 기업들이 차량용 반도체 부품 주문을 줄이면서 파운드리 업체 역시 차량용 반도체 생산량을 줄였다. 그런데 2020년 하반기부터 자동차 판매가 급증했다. 업계 예상보다 빠른 경기 회복 사이클을 반도체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곳곳에 자연재해가 발생해 반도체 수급난에 기름을 부었다. 주요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선 대만·미국·일본 등에서 지진·정전·가뭄이 발생해 생산 차질이 불가피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반도체 품귀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각국이 올해 초 대만 파운드리에 긴급 SOS를 보내며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것으로 봤는데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연재해가 터지면서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시장 정보 제공 업체인 IHS마킷은 자동차 반도체 공급망 차질로 올 1분기 자동차 생산이 100만 대 가까이 미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르면 올 3분기, 늦으면 연말, 일각에선 내년까지 반도체 부족 문제가 장기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애플 최대 협력사인 폭스콘의 류양웨이 회장은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이 2022년 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차량 반도체뿐만 아니라 다른 반도체 분야도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공급망 재검토하라”

극심한 반도체 수급난은 전 세계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스마트폰·노트북·자동차·전기밥솥까지 우리의 일상에 반도체가 침투한 상황에서 반도체 수급난은 곧 나라 경제의 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국은 지역주의를 꺼내들었다. 파운드리를 보유하지 못한 국가들은 ‘내 집 앞마당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공장 가동이 멈춘 미국과 독일에서 이 같은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전자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을 양분하다 보니 ‘공급망 공포’가 닥친 것이다. 닛케이 아시아 리뷰에 따르면 2020년 2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대만) 51.5%, 삼성전자(한국) 18.8%, 글로벌파운드리(미국) 7.4%, UMC(대만) 7.3%, SMIC(중국) 4.8% 순이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미국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관련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500억 달러(약 56조원) 투자 계획에 이어 지난 4월 7일 반도체 인프라 투자 법안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법안 발의 계획을 밝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역시 반도체 자립론을 폈다. 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부 장관은 최근 유럽연합(EU) 내 반도체 제조 기술 발전 프로젝트에 “10억 유로를 즉각 투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EU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제품의 20%를 EU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등에 업은 기업들은 승부수를 띄웠다. 미 반도체 기업인 인텔은 지난 3월 200억 달러(약 22조66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 주에 신규 반도체 공장 2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2016년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했다가 2년 만에 철수한 인텔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한 셈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3월 25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리적으로 균형 잡힌 공급이 필요하다”며 “세계는 혼란과 도전에서 벗어나 더 균형 잡힌 방식으로 미국과 유럽에 반도체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파운드리 고객사로 아마존·구글·마이크로소프트·퀄컴·애플 등을 끌어올 것”이라며 이들 기업을 기존 고객사로 가진 TSMC와 삼성전자에 사실상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이 던진 승부수는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정부는 자국 영토로 TSMC와 삼성전자도 불러들였다. 바이든 대통령의 국가 안보 및 경제 보좌관들은 지난 12일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을 화상회의로 초청했다. 여기엔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GM 등 자동차 테크 기업이 다수 초청됐다. 바이든은 이날 화상회의에서 "중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는 기다리지 않는다"며 공격적 반도체 투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공화·민주 양당 상원의원 23명과 하원의원 42명으로부터 미국을 위한 반도체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초당적 서한을 받았다고 소개하며, "우리는 어제의 인프라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이번 화상회의가 TSMC가 이미 지난해 120억 달러(약 14조7800억원)를 투입해 애리조나에 5나노미터(nm) 공정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것에 비춰 메모리 반도체 1위이자 파운드리 2위인 삼성전자에도 만만치 않은 청구서를 내미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제기하고 있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은 “최선책은 인텔이나 글로벌파운드리 같은 자국 내 기업들이 파운드리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지만 수년 내에 1~2위 기업의 양산 수준을 따라가기 어려워 자국 영토에 TSMC와 삼성전자를 불러들이는 차선책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대만과 한국의 파운드리 기업이 (전쟁 등으로) 무너지면 자국의 산업 전반이 무너진다는 불안감이 반도체 자립을 야기한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 쪽에서 볼 때 대만은 언제든 중국이 침공할 수 있는 상황이고 한반도 역시 전쟁 위기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배경엔 중국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마크 리우 “미·중 갈등이 배경”

마크 리우 TSMC 회장 역시 반도체 공급망의 불확실성은 파운드리의 지역적 편차가 아니라 미·중 간 갈등에 그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리우 회장은 3월 30일 대만 반도체산업협회 행사에 참석해 “(미국의) 화웨이 제재로 다른 모든 경쟁 업체가 남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며 "화웨이 수출 규제로 반도체 업체들은 생산량을 다른 업체에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불확실성으로 “현재 시장에 실사용량보다 더 많은 반도체 칩을 주문하는 심각한 이중 예약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현재 전체 반도체 생산 능력은 여전히 실제 시장의 수요보다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화웨이는 지난해 미국 정부 제재로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사용이 불가능해지고 이어 TSMC로부터 첨단 반도체 조달을 받지 못해 스마트폰 사업을 접어야 할 지경에 처했다. 화웨이는 미국 제재에 대비해 대량 재고를 비축해 버텼으나 올해에는 신제품 출시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제국의 미래’를 쓴 정인성 씨는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인해 화웨이뿐만 아니라 SMIC(중국 파운드리)가 만들던 각종 저부가 가치 반도체의 공급이 감소해 중국권 파운드리의 부담이 늘어난 상황이었다”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이 불안해진 완제품 업체들이 재고를 쌓으려는 움직임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소장 역시 “오바마 정부 시절 대통령에게 보고된 한 보고서 내용의 대부분이 중국 반도체굴기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며 “미·중 간 반도체 갈등은 바이든 정부에서 새로 시작된 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등 미 전 행정부에서 일관되게 펼친 정책”이라고 덧붙였다.

미·중 간 갈등이든, 지역적 불균형이든 한국으로선 반도체 수급 대란이 위기이자 기회다. 이 소장은 “대만과 함께 한국에도 엄청난 기회는 맞다”면서 “TSMC는 중국의 장사 마인드에 미국의 합리성을 더한 회사다. 우리도 전략을 잘 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하기 위해 1160억 달러(약 133조원)를 투자하는 계획을 2019년 내놓은 상태다. 경쟁사이자 현재 업계 1위인 TSMC는 2023년까지 반도체 생산 및 연구·개발에 11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은 500억 달러를 반도체 육성 예산으로 책정했다.

강성철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선임연구위원은 “삼성전자만의 투자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며 “정부는 물론 소부장 업체와 산학연 등 관련 생태계가 모두 나서 시스템 반도체 육성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강 선임연구위원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이 이끄는 반도체 수요를 감당하려면 한국 역시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며 “이번 반도체 자국주의 패러다임으로 한국의 반도체 유관 관계자 모두가 변혁의 의지를 일깨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도 곧 반도체 공급망 대책을 수립 발표할 예정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4월 9일 반도체협회 회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반도체 산업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에 직면했다”며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정부도 업계의 건의 사항을 반영해 한국 반도체 산업 생태계 강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공급망 대책을 수립해 조만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미니인터뷰 1
정인성 ‘반도체 제국의 미래’ 저자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 구축은 현실성 낮아”


‘반도체 제국의 미래’를 쓴 정인성 작가는 반도체 개발 검증 업무를 맡았으며, 현재는 인공지능 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정인성 작가는 이번 각국의 반도체 굴기가 “TSMC나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과 갑자기 반목하게 됐을 때 최소한의 산업 기반을 지켜야 한다는 걱정의 발로”라며 “‘반도체의 안보적 가치’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9년 ‘반도체 제국의 미래’를 썼다. 작금의 상황을 예상했나.
“대규모 공급난이 발생할 것이란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 전 세계가 반도체의 안보적 가치를 깨달을 것이란 것은 알았다. 정확하게는 (각 국가들이) 반도체 제조 역량의 안보적 가치를 알게된 것이다. 화웨이의 자회사인 하이실리콘도 세계 내로라하는 팹리스였지만 대만의 TSMC에 생산을 위탁하면서 결국 (정치적 문제로) 스마트폰 생산에 직격탄을 맞았다. 화웨이 사건을 놓고 한편에선 미국이 중국의 기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쪽에선 자체 제조 역량(파운드리)이 없으면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특히 팹리스 기업으로 먹고사는 국가들이 말이다.”

-반도체 부족으로 각국이 반도체 굴기에 나섰다. 현 상황을 어떻게 보나.
“TSMC가 세계 2위 패권국인 중국의 기술 기업(화웨이)을 망가뜨리고도 현재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등 부작용 없이 잘나가고 있다. 반도체 특히 제조 기술이 세계 2위 국가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다른 국가들도 당연히 ‘IF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이번 반도체 굴기는 아시아 대 서방의 구도가 아니라 TSMC나 삼성전자와 같은 파운드리 기업과 갑자기 반목하게 됐을 때 최소한의 산업 기반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의 발로라고 본다.”

-자국주의 현상이 앞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나.
“반도체 기술이 성능을 높이고 부가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거대한 파운드리 기업들이 전 세계적 수요를 감당해 규모의 경제를 만들고 수많은 팹리스들이 엮이는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파운드리와 팹리스 간 사실상의 표준과 언어가 생긴다. 대부분의 팹리스들은 파운드리업계 1위인 TSMC와 협력할 것을 전제로 제품을 설계한다. 팹리스들이 자신의 칩을 설명할 때 ‘TSMC의 7나노에 우리 칩 설계를 더하면 이런 성능이 나온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반도체업계에서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마치 영어를 쓰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하나 만들겠다는 얘기와도 같다. 이런 생태계를 벗어나 자국주의로 간다는 것은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비효율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고리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머신러닝이나 언택트(비대면) 등 향후 4차 산업혁명에서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더 큰 시장에서 패배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각 국가들이) 반도체의 안보 가치를 느끼더라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파운드리 업체를 자기 집 마당으로 초대하는 일인 것이다. 결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각 국가 간 충돌은 실현되지 않고 다시 원래대로 냉랭하지만 협업할 것은 하는 형태로 돌아갈 것이다.”

-미 행정부가 삼성을 초대했다.
“(친미로 돌아선) TSMC가 미국에 공장을 짓기로 한 것처럼 미국으로선 중국보다 우위에 서 파운드리의 목줄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조 역량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 텃밭에 공장을 유치하거나 합자회사를 세우는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다. TSMC는 미·중 무역 분쟁의 한복판에서 친미로 돌아섬으로써 국가 위상을 높였고 외교적 이익도 얻어냈다. 하지만 그 청구서로 미국 내 5나노미터 공정 반도체 공장 설립을 주문받았다(약 15조원 투입 예정). 삼성전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만 TSMC는 ‘잘했으니 당근’ 형태였다면, 삼성전자에는 ‘안 따라오면 채찍’ 형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삼성전자가 서방 세계를 이탈해 중국을 고객으로 두게 되면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청구서는 삼성전자가 서방을 이탈할 가능성에 비례해 커질 것으로 본다. 한국이 일본처럼 친미가 된다면 조그마한 공장 설립으로도 상징성을 인정해 주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대규모의 투자를 주문할 것이다. 한국에선 결국 투자를 위축시키고 핵심 기술의 유출을 부를 수 있는 일이다. 대만은 TSMC가 대만 대신 청구서를 받아 미국에 제출한 셈이 됐지만 기업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 정부가 외교적으로 나서 미국의 불안을 덜어 주고 중국 시장 역시 버릴 수 없기에 어느 정도의 양보를 얻어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미니인터뷰 2
김정호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핵심은 미
·중 갈등…반도체는 경제 아닌 정치 문제”

김정호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는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일반에게 어려운 반도체를 쉽게 소개하고 있다. 김 교수는 “반도체 수급난은 경제가 아닌 정치 문제”라며 “해결하기 요원한 미·중 갈등 문제 그 사이에 반도체가, 한국이 끼여 있다”고 말했다.

-지금 반도체 부족 현상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대란이다. 반도체 부족은 지난해 4분기 차량용 분야에서 주로 일어났다. 지금은 가전제품·컴퓨터·게임기 등 모든 분야에서 반도체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요가 폭발한 데다 일본 반도체 업체인 르네사스에서 화재가 났고 텍사스에 한파가 몰아 닥치면서 반도체 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곳곳에서 반도체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은 부분 중단되니 모든 분야에서 반도체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반도체는 B2B에서 이뤄지는 부분이라 소비자가 체감하기는 어렵다. 다만, 주문 후 발주까지 시간이 더 지체되면서 차츰 체감할 것이다. 2021년 1분기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하지 못한 차량 대수를 보면 미국을 비롯한 북미 지역의 피해가 41만1000대로 가장 크다.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은 28만6000대다. 아시아 지역은 23만9000대로 추산됐다.”

-반도체 대란, 얼마나 더 오래 갈 것으로 보나.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가 증가하는 만큼 차량 반도체 수요도 계속 증가한다. 하지만 공급은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차량용 반도체는 구식 공정에서 제조하는 것이 많다. 7나노, 5나노 식의 최신 공정으로 만드는 반도체가 스마트폰이나 고성능 PC에 사용된다면 자동차는 공간이 넓기 때문에 굳이 스마트폰용처럼 극단적으로 미세 공정을 쓸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런 구식 공정들을 위한 장비를 공급하는 기업도 별로 없거니와 반도체 생산 업체에서 차량용 반도체의 우선순위가 낮기도 하다. 게임기용 반도체가 300~400달러 수준인데 차량용 반도체는 하나당 1달러 수준에 그칠 정도로 싸기 때문이다. 사정이 급하다 보니 자동차 생산이 막힌 미국과 유럽에서 정부 외교 채널을 통해 대만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지경에 달했다. TSMC도 차량용 공급을 늘리겠다고 했지만,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0%일 정도로 매력적인 품목은 아니란 점이 문제다.”

-공급 부족 문제가 저마다의 반도체 굴기로 번졌다.
“반도체가 없어 나라 경제가 셧다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겼다. 그러니 자기 영토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 생태계에서 자립은 사실상 불가하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2001년 당시 첨단 공정의 반도체 공장이 29개였는데 급격하게 줄어들어 2020년에는 3개만 남았다. 미국의 인텔,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전자 등 세 군데다. 반도체 제조 공장의 숫자가 줄어드는 이유는 반도체 제조에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워낙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2020년 TSMC가 대만에 건설한 3나노급 첨단 시설은 무려 20조원이 들었다. 비용의 문제뿐만 아니라 실패 가능성도 매우 높기에 파운드리 시장에 직접 뛰어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급망 공포’ 앞에선 세계…반도체 자립 뒤늦은 유턴
-이 같은 지각변동이 삼성전자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외신은 이 같은 규모의 경제로, 최후의 승자는 TSMC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TSCM와의 파운드리 경쟁에서 후발 주자란 점 외에도 삼성전자의 최대 약점은 자기 비즈니스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 파운드리에 맡기자니 고객사로서는 삼성의 메인 비즈니스와 상품(스마트폰·PC·TV 등)이 겹친다. 설계에 담긴 노하우가 새나갈 가능성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삼성이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리하기는 했지만 라인을 완전히 따로 만들지 않는 한 신뢰도 부분에서 위탁 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TSMC보다 우위에 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 기업과 협력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최근 TSMC는 R&D센터를 일본에 세우기로 하고 후공정 공장도 두기로 했다. 친미·일 구도에 다가가는 것은 물론 소재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가진 일본 업체들과 협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삼성전자에 일본 업체와의 협력은 정치적으로나 여론으로 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각국의 반도체 굴기가 한국에 미칠 영향은 뭔가.
“사실 이번 공급 대란으로 한국(삼성전자)과 대만(TSMC)의 몸값이 굉장히 비싸진 상태다. 단, 정치적인 코드가 문제다. 대만은 이미 미국 편에 섰고 그 후 대만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 단계에 진입했다. 한국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반도체 문제는 단순 경제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다. 바이든 정부 들어 미국과 일본이 굉장히 가까워졌다. 미국이 한국을 불러들이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반도체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중국의 눈치도 봐야 한다. 만약 한국이 미국편에 선다면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 조치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미·중 갈등은 해결하기가 요원한 문제다. 점점 더 치열해질 것이다. 그 사이에 반도체 문제가 끼여 있다. 반도체를 손에 쥔 한국이 지금까지는 눈치싸움으로 미국과 중국 시장 모두를 상대했는데 바이든 정부에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어려운 문제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