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카 등장 후 레몬마켓에서 피치마켓으로 전환…인기 브랜드·차종일수록 잔존 가치 방어 우수

[스페셜 리포트]
‘그랜저 6.96%·벤츠 23.51%’…중고차 가격 좌우하는 감가율의 비밀
“1가구 1차 시대, 한국에도 이제 마이카 시대가 열렸습니다.”

2015년 인기리에 방영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했던 광고 문구 중 하나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과 대규모 노동 운동 이후 노동자의 실질 소득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서 서울올림픽 개최 시점을 전후해 ‘대량 소비 시대’가 열렸다. 자동차 판매와 등록률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마이카 시대’와 ‘오너 드라이버’라는 신조어도 이즈음 탄생했다.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1인 1차 시대’가 도래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437만 대다. 인구 2.13명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한 수준으로 미국(1.1명)과 일본(1.7명), 독일(1.6명) 등과 비교해 약간 낮은 수준이다. 4인 가구 기준 차량 2대를 보유한 셈이다.
‘그랜저 6.96%·벤츠 23.51%’…중고차 가격 좌우하는 감가율의 비밀
소비자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전에 비해 더욱 현명하게 차량을 구매하고 있다. 신차의 운명은 크게 세 가지다. 폐차, 보상 판매(다른 차 구매 시 세일즈맨에게 판매), 중고차 시장에서의 현금화 등이다.

이 과정에서 차량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감가율’이다. 감가율은 신차 가격 대비 중고차 값의 하락 비율이다. 감가율이 낮을수록 차량을 판매할 때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반면 감가율이 높으면 낮은 가격에 차량을 팔아야 한다. 즉, 감가율이 50%라면 신차 값 대비 반값이 됐다는 뜻이다.

미국에선 중고차 시장을 ‘레몬마켓’이라고 표현한다. 시고 맛없는 레몬만 있는 시장처럼 저급품만 유통되는 시장이 레몬마켓이다. 판매자보다 제품에 대한 정보가 적은 소비자들이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속아서 살 가능성을 우려해 싼값만 지불하려고 하고 그로 인해 저급품만 유통되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불량품이 넘치면 결과적으로 소비자도 외면하는 시장이 된다.

중고차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소비자가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 놓여 차량을 사고팔 때 손해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에 따라 중고차 시장에선 차량을 잘못 구매하거나 파는 경우가 많아 ‘눈탱이 맞았다’란 표현을 썼다.

단, 현재 중고차 시장은 레몬마켓의 반대말인 ‘피치마켓’으로 통한다. 여러 중고차 업체가 온라인으로 차량 가격과 상태 등을 공개하면서 투명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SK엔카’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랜저 6.96%·벤츠 23.51%’…중고차 가격 좌우하는 감가율의 비밀
SK엔카, 레몬→피치마켓 전환 선봉

국토교통부가 공개한 자동차 등록 현황을 보면 지난해 신규 등록된 차량은 191만 대다. 중고차 거래를 통해 등록된 차량은 387만4000대로 신규보다 두 배 정도 많다. 실제 판매가 이뤄진 차량도 2019년 기준 신차는 178만 대, 중고차는 224만 대다. 중고차 1대 평균 매매가격을 1000만원으로 가정한다면 한국의 중고차 시장 규모는 약 22조원이다. 한국GM·르노삼성·쌍용차 등 3사의 지난해 매출 합계 16조7576억원보다 많다.

거대 중고차 시장의 투명화에 앞장선 기업은 1999년 최태원 SK 회장의 비전 프로젝트에 따라 사내벤처로 시작한 SK엔카다. 당시 SK주식회사(현 SK이노베이션)의 박성철 과장이 고심 끝에 만들어 낸 비즈니스 플랜이 SK엔카다.

SK에너지의 영문 앞글자 ‘엔(EN)’에 ‘카(CAR)’를 합성해 기업명이 정해졌다. 엔카는 2000년 1월 중고차 오픈 마켓을 열고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같은해 12월 SK주식회사의 별도 독립 법인인 엔카네트워크로 분사해 SK의 42번째 계열사로 편입됐다.

엔카가 출범하기 전까지 소비자들은 차량을 판매하기 위해 대부분 중고차 매매 단지로 향했다. 이곳은 흔히 ‘나카마(딜러)’라고 불리는 소규모 유통업자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일부 딜러는 소비자에게 적정가보다 싸게 차량을 매입해 비싸게 팔기도 했다. 적절한 감가율을 무시하고 싼값에 차량을 매입하기 위해 잔존 가치를 낮게, 팔 때는 이익을 많이 남기기 위해 비싼 값에 팔아 온 것이다.

소비자들은 차량 시세에 관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유통업자의 말만 믿고 차량을 사고팔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레몬마켓의 특성상 발품을 팔지 않는 이상 본인의 차량 가격 산정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엔카가 등장하면서 시장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보유 차량을 중고차로 딜러에게 넘기거나 살 때 엔카에 업로드된 게시물로 시세를 파악했다. 업계 용어인 ‘눈탱이’를 맞는 이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중고차업계 A 관계자는 “중고차에는 일물일가의 원칙이 적용된다. 같은 연식의 동일 차종이라고 해도 주행 거리와 색상, 소유주의 차내 흡연 여부 등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며 “이를 악용해 소비자를 속이는 행위를 하는 딜러가 일부 있었지만 엔카가 출범해 어느 정도 평균 가격이 형성된 후 확연히 줄었다”고 말했다.

시장이 투명화되는 과정에서 엔카와 딜러들 간에 살벌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비자가 엔카에서 차량 가격의 적정선을 파악하고 판매와 구매에 나서자 딜러 측에선 예전처럼 많은 마진을 남기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몇몇 딜러가 엔카 사무실에 흉기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린 사건도 있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의 중고차 시장은 과거에 비해 확연히 투명해졌다. 10~15%의 마진만 남기는 것이 딜러 사이에서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1000만원에 차량을 매입했다면 1100만~1150만원에 되파는 행태가 자리 잡은 것이다. 엔카 외에도 국토교통부가 운영하는 ‘자동차365’ 등에서도 차량 시세를 파악할 수 있어 소비자를 속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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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마켓에서도 더욱 똑똑해진 소비자

정보의 비대칭성이 해소된 피치마켓에서 소비자들은 더 똑똑해지고 있다. 차량 구매 희망자들은 여러 정보를 수집해 구입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린다. 대표적인 고관여 제품에 자동차가 해당하는 만큼 취향에 따라 특별히 원하는 기능과 디자인, 유지비, 중고로 되팔 때 가격 등 여러 가지를 따진다.

그중 핵심은 차량 감가율이다. 자동차 교체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추세인 한국에서 감가율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자동차 교체 주기는 3~5년이 가장 많다. 차량의 성능, 디자인 변경, 생애 주기 등에 맞춰 차량을 바꾼다. 이에 따라 차량을 구입할 때 3~5년 후 얼마의 가격에 팔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일반적으로 국산차의 평균 감가율은 신차 기준으로 출고된 지 1년이 지나면 10%대, 3년은 30%대, 5년이 되면 50%대 수준이다. 인기 차종은 감가율이 낮고 반대는 감가율이 더 높다.

감가율은 차량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서도 다르다. 인기 브랜드·모델일수록 가격 방어가 뛰어나다. 엔카닷컴에 따르면 감가율 방어가 가장 우수한 브랜드는 현대차다. 그랜저·아반떼·쏘나타 등은 인기 모델인 만큼 가격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엔카닷컴에 따르면 2020년식 더 뉴 그랜저 IG의 감가율은 6.96%다. 신차 가격이 3750만원인 이 차량의 현재 시세는 3489만원이다. 국내 완성차 업체의 차종 중 감가율 방어가 가장 뛰어나다. 같은 연식의 더 뉴 아반떼(10.45%)와 쏘나타 DN8(12.65%)도 잔존 가치가 높다.

기아도 수요가 많은 만큼 감가율이 낮은 편이다. 2020년식 올 뉴 K3의 현재 시세는 1620만원으로 감가율은 11.48%다. K7 프리미어(13.54%)의 현재 시세는 2810만원이다.

현대차·기아 대비 비인기 브랜드인 쉐보레·르노삼성·쌍용차 등은 감가율이 높다. 특히 쉐보레 2020년식 더 뉴 말리부는 감가율이 20.44%다. 인기 차종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세는 2585만원으로 신차(3249만원)와 비교해 700만원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수입차는 국산차보다 잔존 가치 인정이 어렵다. 수요가 적고 수리·점검비가 국산차보다 많이 들어서다. 수입차의 평균 감가율은 출고 1년 20~30%, 3년 40~50%, 5년 전후로 60%대까지 떨어진다. 5000만원짜리 수입차를 구매했다면 3년 후에는 반값인 2500만원이 된다는 얘기다.

벤츠·BMW·아우디 등 3개 대표 수입차 브랜드도 중고차 시장에선 맥을 못 추는 편이다. 2020년식 기준으로 벤츠 S클래스의 감가율은 23.51%, BMW 520d는 32.75%, 아우디 A6는 35.21%다. 감가율이 큰 아우디 A6는 신차가격이 6473만원이지만 중고차 시세는 4451만원이다. 1년 새 2000만원이 줄어든다.

즉, 새 차를 사거나 중고차를 구입할 때 감가율이 낮은 차를 사면 손해를 볼 가능성이 낮아진다. 단, 감가율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차량 인기도로 결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시장의 논리처럼 수요가 많으면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다. 쉽게 선택하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하기 어려울 때는 인기 차종을 고르는 것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길이다.

인기 차종은 부품 공급도 원활해 수리 기간이 짧고 비용도 아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차량이 단종되더라도 중고·재생 부품을 찾기 쉽다.

중고차업계 B 관계자는 “사람들이 많은 찾는 차량에는 이유가 있다”며 “가격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소비자라면 인기 차종 외에도 수요가 많은 색상과 옵션 등도 고려 사항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랜저 6.96%·벤츠 23.51%’…중고차 가격 좌우하는 감가율의 비밀


[돋보기] 접촉 사고 보상금 산정에도 활용되는 감가율

에쿠스와 스파크의 접촉 사고가 발생했다. 어느 쪽이 더 많은 돈을 배상해야 할까. 정답은 에쿠스 차주다. 에쿠스는 2015년 단종된 모델이다. 2005년식 에쿠스와 2021년식 스파크가 5 대 5 과실 기준으로 접촉 사고가 났다면 에쿠스 차주가 스파크 측에 더 많은 돈을 배상해야 한다. 2005년식 에쿠스의 시세는 300만원, 2021년 스파크는 1000만원이다. 배상금은 보험개발원이 제공하는 차량 기준가액으로 산정된다. 기준가액은 감가율을 통한 잔존 가치로 보상금을 계산한다. 동급 차량끼리의 접촉 사고도 인기 브랜드·모델에 따라 배상금이 다르다. 감가율은 차량 구매뿐만 아니라 운행 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유호승 기자 y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