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가 포문 연 ‘배터리 내재화’ 확산
가격 경쟁력 확보해 주도권 선점 노림수

[비즈니스 포커스]
현대차의 아이오닉5  /현대차 제공
현대차의 아이오닉5 /현대차 제공
테슬라를 시작으로 폭스바겐·제너럴모터스(GM)·포드·현대차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잇따라 배터리 독립을 선언하고 있다. 그동안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으로부터 배터리를 공급받던 완성차업계에 배터리 자급자족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배경과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완성차업계의 배터리 자체 조달 움직임의 주된 배경은 향후 배터리 공급 부족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전기차 시장의 고성장세에 따라 2025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는 2023년부터 배터리 수요가 공급을 7% 초과하는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2025년에는 그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배터리 내재화의 포문을 연 엘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2022년부터 중대한 물량 부족이 예상된다며 배터리 자체 생산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래픽=윤석표 기자
그래픽=윤석표 기자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이 자체 배터리 비중을 2030년 80%로 높이겠다고 4월 15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외르크 타이히만 폭스바겐 최고구매책임자(CPO)가 배터리 성능을 끌어올릴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폭스바겐뉴스 캡처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이 자체 배터리 비중을 2030년 80%로 높이겠다고 4월 15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외르크 타이히만 폭스바겐 최고구매책임자(CPO)가 배터리 성능을 끌어올릴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폭스바겐뉴스 캡처
공급 부족 우려 속 내재화 선언 잇달아
자동차 업체가 배터리를 직접 생산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가격 경쟁력이다. 전기차 보급을 늘리기 위해서는 전기차 전체 생산 비용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배터리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기차가 보조금 없이 내연기관 자동차와 경쟁하려면 배터리 가격이 차량 가격의 20% 미만으로 떨어져야만 한다.

관건은 자동차 업체들이 배터리 회사만큼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은 고도의 기술력과 생산 설비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자본 집약적 장치 산업인 만큼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 한국 배터리 3사에 배터리 내재화에 따른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앞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주력인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중국 CATL 등이 제조하는 ‘각형 배터리’를 주력으로 삼겠다는 폭스바겐의 배터리 독립 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의 배터리 관련 주가가 휘청이기도 했지만 업계는 과도한 우려라고 보고 있다.

한국 배터리 3사도 완성차업계의 배터리 내재화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1년 1분기 실적 콘퍼런스 콜에서 “전지 사업은 신규 업체가 진입하기에 진입 장벽이 있고 다수의 핵심 기술이나 특허뿐만 아니라 오랜 양산 노하우가 축적돼야만 한다”며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수요를 모두 내재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SDI도 “테슬라에 이어 폭스바겐이 배터리 내재화를 발표했지만 배터리 개발과 양산은 노하우가 필요하다”며 “내재화로만 전체 필요를 충당하기 어려워 배터리 업체와의 협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기술 개발과 공급 기반 구축 경쟁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배터리 산업 주도권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업계가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매진하는 이유다.

완성차업계에서 도요타·BMW·현대차 등이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배터리업계도 차세대 배터리 상용화를 위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차세대 배터리 분야에서는 아직 뚜렷한 선두 업체가 없는 만큼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지적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배터리 양극과 음극 사이의 전해질을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하는 기술로, 리튬 이온 배터리의 폭발 우려와 크기·수명 등 단점을 보완할 수 있어 차세대 배터리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은 리튬 이온 배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10년 뒤에는 차세대 배터리가 리튬 이온 배터리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픽=윤석표 기자
그래픽=윤석표 기자
기술 진입 장벽 때문에 쉽지 않을 듯
문제는 배터리 자급자족이 일부 완성차 업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배터리 업체들은 글로벌 완성차업계의 배터리 내재화 확산과 함께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미국과 유럽이 배터리 산업 육성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미국과 유럽은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한 배터리 의존도를 낮추고 배터리 자급자족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내 전기차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8년간 1740억 달러(약 195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유럽은 전기차 배터리 자급자족을 위해 2028년까지 29억 유로(약 3조900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의 마로스 셰프초비치 부집행위원장은 유럽이 2025년까지 전기차 배터리 셀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생산할 수 있고 600만 대에 공급하기 충분한 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은 강력한 환경 규제와 보조금 지급 등 친환경 정책에 힘입어 2020년 133만 대의 전기차 신규 등록 대수를 기록해 125만 대에 그친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부상했다. 배터리 산업 육성에도 정책 지원을 쏟아붓고 있어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도 강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 조사 업체 블룸버그NEF는 세계 배터리 생산량 중 유럽의 비율이 2020년 7%에서 2030년 31%로 급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배터리업계는 핵심 소재 내재화·국산화로 배터리 내재화에 대한 대응 태세를 갖추고 있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리튬 이온 배터리의 원가 구성은 양극재 40%, 음극재 10%, 분리막 15%, 전해질 10%, 조립 등 기타 부문 25%로 구성된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는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 내재화율을 계속 높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를 통해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을 공급받고 있다. 한국은 배터리 핵심 소재 상당수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안정적인 수급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핵심 소재 국산화가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핵심 소재인 음극재·양극재 등의 공급이 중단되면 배터리 회사들이 생산을 못 하게 되기 때문에 한국의 핵심 소재·부품 국산화 현상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며 “이를 통해 원가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고 공급망 불안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