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CBDC 모의 실험 위해 사업자 공모
한은 “기존 화폐 대체재 아닌 보완재”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본부 건물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본부 건물 모습. /사진=연합뉴스
새로운 화폐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영국·스웨덴·러시아·일본·태국 등 세계 곳곳에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10월부터 CBDC를 시범 운영하고 있고 그동안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미국까지 CBDC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도 변화하는 세계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관련 기술 실험과 제도를 검토하는 등 준비에 돌입했다. 50억원 규모의 모의 실험엔 시중은행과 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의 각축전이 예상된다.

물론 한국 정부는 CBDC 도입을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통화량을 조절하는 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국제금융센터는 CBDC 관련 보고서에서 “CBDC 발행은 내수 촉진, 디플레이션 압력 완화 차원에서 통화 정책 효과를 증대시킬 것”이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감염병이 대유행할 때 개인에게 직접 CBDC를 입금하는 ‘헬리콥터 머니’ 정책을 이전보다 쉽게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시장연구원도 CBDC 관련 보고서를 통해 “금융 위기로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면 기존 시스템보다 예금 대신 소비가 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예측했다.
CBDC 모의 실험, 발행·유통부터 구매까지
한국은행은 올해 하반기부터 모의 실험을 시작한다. 약 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10개월 동안 시범 플랫폼을 마련한다. 7월 기술 평가와 협상 등을 거쳐 사업자와 계약을 체결한 후 8월 중 모의 실험 연구에 착수한다. 12월까지 1단계 실험을 완료하고 내년 6월까지 2단계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정부는 기술 검증은 물론 CBDC가 제 기능을 하는지 보고 상용화할지, 말지 결정할 예정이다.

‘가상화폐를 왜 중앙은행이 만들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CBDC는 블록체인(분산 저장) 기술을 기반으로 전자적인 형태로 거래된다는 점에서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 비슷하지만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고 관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급등락을 반복하는 가상화폐와 달리 현금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는 의미다.

이번 모의 실험은 현금 사용이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입하기 위한 준비 단계다. 유희준 한국은행 금융결제국 디지털화폐기술반장은 “미래 다양한 형태의 결제 서비스 시장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를 대비하는 게 우리의 역할인데 각 나라마다 CBDC를 개발하거나 도입하는 이유는 다르다. 우리처럼 전자 금융 서비스가 잘 발달돼 있는 나라는 단순히 전자 금융 서비스 역할을 하는 CBDC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데이터를 어디에든 저장해야 한다. 일반 화폐도 지갑, 휴대전화 케이스 등 여러 곳에 넣어 두고 쓰듯 향후엔 전자 화폐를 카드·스마트폰·웨어러블 디바이스 등 여러 가지 기기에서 제공해 활용성을 높이는 방법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모의 실험은 2단계로 구분해 추진한다. 1단계에선 CBDC의 발행·유통·환수 등 기본 기능에 대해 검증한다. 한국은행이 CBDC 제조·발행·환수 업무를 담당하고 은행과 빅테크 등 민간이 이를 유통하는 방식을 가정해 실험을 진행한다. 이때 입찰 참가자들은 한국은행이 설계한 CBDC 모의 실험 환경을 가상 공간인 클라우드에 구현해야 한다. 2단계에선 CBDC 실험을 확장해 국가 간 송금, 디지털 예술품 및 저작권 구매, 오프라인 결제 등 실험을 진행한다. 개인 정보 보호를 강화할 수 있는 신기술 등 적용 방안도 연구한다.

간단히 말하면 한국조폐공사가 현금을 발행하듯 한국은행이 CBDC를 제조하고 발행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보자. 우선 한국은행은 물리적으로 단절된 네트워크 환경에서 CBDC를 제조해 발행 전까지 하드웨어 전자 지갑에 보관한다. 이후 참가 기관이 CBDC 발행을 중앙은행에 요청하면 당좌예금 잔액을 차감하고 해당 기관의 전자 지갑에 제조된 CBDC를 전송해 발행하는 구조다. 환수할 때는 참가 기관이 반환할 CBDC를 중앙은행 전자 지갑에 전송하면 중앙은행이 해당 기관의 당좌예금 잔액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구현할 계획이다.

이 밖에 참가 기관은 개인과 가맹점이 CBDC를 현금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 한편 개인이 소유한 원화를 CBDC로 환전해 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조심스러운 ‘디지털 원화’ 실험…은행권 역할 축소론에 긴장
눈여겨볼 점은 참가 기관에 거액 결제용 전자 지갑이 발급된다는 점이다. 현재 거액 결제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는 곳은 은행뿐이지만 CBDC가 실제 발행된다면 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 업체에도 거액 결제용 전자 지갑이 발급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전통 은행의 역할이 축소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은행과 일반 소비자의 직거래로 중앙은행의 시장 참여도가 높아지면서 시중은행은 위축된다는 것이다. 금융업 관계자는 “현재 한국은행에서 통화를 발권하고 금융결제원 링크를 타고 은행을 거쳐 계좌로 연결된 빅테크 플랫폼(전자 지갑)에 입출금되는 구조인데, CBDC 도입으로 중앙은행에서 바로 개인의 전자 지갑에 발행되면 금융결제원과 은행의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고객에겐 편의성이 높아져 이 같은 현상이 가속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통장을 발급받으려면 은행 계좌에 1원을 입출금하는 등 많은 단계 거쳐야 하는데 CBDC가 개인 지갑으로 바로 들어오면 통장을 굳이 발급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극단적인 추측이라며 선을 그었다. 유희준 반장은 “CBDC 도입 원칙 중 하나가 현재 금융 서비스 원칙을 훼손하지 않고 조화롭게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CBDC를 대체재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상호 보완재로 봐야 한다”며 “현금 없는 사회는 과한 시각”이라고 말했다.
시중은행 vs 빅테크 입찰 경쟁 전망
조심스러운 ‘디지털 원화’ 실험…은행권 역할 축소론에 긴장
어쨌든 모의 실험 입찰에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등 시중은행을 비롯해 네이버와 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의 참여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들은 각각의 컨소시엄을 꾸려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권과 빅테크의 CBDC 경쟁은 미래 금융 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쥐게 되느냐 하는 전초전이라는 평가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빅테크가 더 유리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네이버는 자회사 네이버파이낸셜과 라인플러스를 통해 CBDC에 필요한 결제 플랫폼과 블록체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을 내세웠다. 특히 라인플러스는 중남미·아프리카 지역 CBDC 플랫폼도 공략할 만큼 저력을 보이고 있다. 카카오는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를 통해 CBDC 맞춤 기능을 미리 구현해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빅테크 대세론 속에 은행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모양새다. 시스템 업체(SI), 연구 기관 등과 손잡고 블록체인 기반의 플랫폼을 개발하며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건 KB국민은행이다. 2019년 LG CNS와 협력해 전자 화페인 ‘마곡페이’를 개발, LG 사이언스파크 내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했다. 이를 바탕으로 CBDC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을 검토 중이다. 신한은행도 올해 LG CNS와 CBDC 발행에 대비한 ‘디지털 화폐 플랫폼’을 시범 구축했다. 개인 고객과 가맹점이 CBDC 결제·송금·환전·충전을 할 수 있도록 개발할 방침이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포항공대(포스텍)와 테크핀 산학협력센터를 설립한 데 이어 올해 CBDC 기술 검증과 시범 시스템 구축을 끝마쳤다. 처리 속도가 빠르고 서로 다른 블록체인과 연계가 용이한 코스모스(Comos) 플랫폼을 이용, 디지털 화폐가 실물 화폐처럼 원활하게 융통될 수 있는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증한다.

최광혁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새로운 시장을 재빨리 진입해 퍼스트 무버가 돼야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다. 이번 실험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라면서 “현금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본원 통화에 지급 준비금, 실물 화폐와 함께 CBDC가 추가된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은행 축소론도 있는데) 은행을 뺀채 실험 등을 진행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