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경영’과 ‘전략적 모호함’은 전략 고수의 필수 아이템

[경영 전략]
‘꽉 막힌 사람’과 ‘모호한 언어’가 꼭 필요한 이유[박찬희의 경영 전략]
경영학 책에는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그럴듯하고 무난한’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학교에서 쓰는 교재나 논문들이 그런데, 정말로 치열하게 ‘명운(命運)’을 걸고 경영의 문제를 풀어 가는 사람들은 그런 ‘학습 자료’를 볼 일이 없고 학교에선 적나라한 현실에 눈감고 무난한 말로 때워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그럴듯한 공상들로 구성된 일종의 가상현실이 생겨 버린다.

막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오히려 사람들 머릿속의 가상현실과 달라 불편하다 보니 적당히 꾸며대는 일도 있다. 그야말로 ‘메타버스(metaverse)’가 열리는 셈이다.

책 쓰는 사람들이 치열한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지, 적나라한 현실을 담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쓴 책이나 논문을 대충 외워서는 ‘경영이란 이런 것이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을 늘어놓고 이것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꼴을 보면 세상에 이런 무책임한 짓이 없다.

자기가 무엇을 제대로 알고 또 모르는지 확인과 반성이 없으니 경영의 현실과 다른 ‘경영학의 가상세계’가 만들어진다. 실제로 경영학과 졸업생들이 기업과 경영자에 대해 일종의 ‘공상적 이해’를 갖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환상으로 직장을 찾고 돈벌이에 나서니 쓸데없는 공부로 인생 망치기 딱 좋다.

‘그럴듯하고 무난한 학습 자료’의 대표적인 것은 경영자는 빠르고 신속한 의사 결정을 내리고 일사불란한 명령과 통제의 과정을 통해 실행한다는 생각이다.

직접 상황을 파악해 대안을 마련하고 앞장서 문제를 풀어 내는 카리스마 가득한 경영자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시간을 끌면서 유리한 국면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도 있고 경영자 스스로가 잘 몰라 여러 가능성을 놓고 눈치를 보는 일도 많다.

기업의 의사 결정 과정은 빠르고 일사불란한 명령과 집행만이 아니라 이런 미묘한 사연들이 빚어내는 상황을 풀어 내는 일도 많다.

느린 경영을 위한 브레이크

A그룹의 C회장은 과감한 현장 경영, 특히 국내외 최고위층과의 담판을 통한 속전속결 방식의 사업 진행으로 유명하다. 인수·합병(M&A) 협상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서명하고 다음 날 계약과 입금까지 마친 사례는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 C회장은 이런 전설과 달리 꾸준히 시간을 벌며 상황을 주시하다가 결정적 시점에 판을 바꾸는 지연 전술의 달인이기도 하다(하는 일마다 속전속결 전격 적으로 실행하면 망하기 십상이고 사람들이 따라갈 수도 없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C회장은 경제 개방에 나선 모 개발도상국을 방문한 길에 현지 국가의 최고위층으로부터 대규모 가스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제안 받았다.

불안한 현지 정치 상황과 권력 구도, 막대한 투자비가 부담되지만 이 프로젝트를 거절하면 이 나라에서 진행되는 전자 제품 조립 공장 건설과 항만 개발 사업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권력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C회장과 A그룹에 호의적으로 대우해 준 최고위층도 난감해진다.

‘전격 합의’만 하고 사업 진행을 지연하면 이 나라 최고위층은 C회장에 배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다 막강한 현지 정보 경찰은 C회장과 A그룹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니 흉내만 낼 수도 없다.

눈치 없는 A그룹 임직원들은 경영학 수업에서 배운 ‘열정 가득한 도전과 실천’에 ‘회장님 프로젝트’로 한 건 화끈하게 해서 출세해 보려는 현실적 계산까지 더해 열과 성을 다해 사업을 추진한다.

C회장은 ‘천천히 눈치껏 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가스전 프로젝트를 ‘느린 경영’의 세계로 끌어 간다. 트집 잡기, 책임 떠넘기기로 가득한 결재와 꼼꼼한 사후 확인으로 유명한 M부사장을 현지의 총괄대표로 선임해 가스전 개발을 맡기고 국내의 사업 지원과 관리도 그와 비슷한 꽉 막힌 사람들로 배치한다.

M부사장이 부임하자 가스전 사업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단어 하나를 놓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확인하고 사안마다 백업으로 ‘플랜B’, ‘플랜C’를 요구하니 현지 직원들은 물론 국내 지원 부서도 정신없이 바쁘다. 사안마다 현지 당국자들에게 확인을 요구하니 미팅과 통화가 끝없이 이어진다. 누가 봐도 이처럼 성실한 사업추진이 없다.

M부사장은 느린 경영을 위해 설치된 고성능 브레이크다. 사업의 속도 조절과 안전을 위해 매우 필요한 존재다. M부사장 때문에 사업 추진이 안 된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눈치 없는 사람들도 현지 국가의 관계자들에게 A그룹의 사업 의지를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C회장은 M부사장이란 안전장치를 작동해 놓고 전자 제품 조립 공장과 항만 개발 사업은 필요할 때 날아가 ‘현지 지도’한다. 결재 과정의 급소 한두 개만 누르면 진도를 나가는 데 무리가 없고 별로 티도 나지 않는다.

현지 최고위층 인사들과의 자리에서 M부사장을 치켜세우고 직원들 앞에서 등이라도 어루만지며 스킨십을 과시하면 브레이크는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세련된 속도 조절로 가스전 개발 사업의 진도를 늦추는 동안 현지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고 권력 승계 등 정치 구도도 자리잡으면 이제 M부사장을 국내 계열사 사장으로 보낸다.

승진인지 전보인지 모호하지만 아무튼 느린 경영이 필요한 사업 현장은 어디든 있고 C회장에게 이보다 나은 브레이크는 아직 없다. 가스전 사업에 속도가 붙고 다른 사업들도 완성되면 C회장의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신속한 의사 결정과 사업 추진은 경영학 책에나 나오는 하수들의 얘기일 뿐이고 그런 책을 외워서 공상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맞춰 주는 ‘착한 척’ 연출에 쓰이기 딱 좋다.

간결하고 명확한 의사 전달, 좋은 얘기다. 경영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어쩌고 하는 책에는 항상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작은 가게 사장님도 직원에게 가게가 어려우니 닫을지 모른다고 얘기할 수 없는데, 하물며 간결하고 명확하게 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전략적 고려를 반영한 건설적 모호함

이번엔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가가 된 Q회장의 사례를 보자. 나름 자동차업계의 리더이지만 솔직히 자동차와 에너지의 미래에 대해선 자신이 없다. 전기차·수소연료전지·배터리·자율주행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놓고 세상의 변화에 올라탈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잘 몰라 여기저기 눈치 보는 중”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이럴 때 쓰는 유식한 경영학 용어가 바로 ‘실험적 학습(experimental learning)’인데 솔직히 대중의 상식으로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투자자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간결하고 명확한 메시지는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이해되므로 해석과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 말의 책임이 고스란히 돌아온다. 정치인의 말 바꾸기와 달리 경영자는 그로 인한 손해가 명확해 소송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사업 방향이나 현안에 대해 아무런 메시지가 없으면 이 또한 시장·투자자·이해관계인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유능한 경영자는 다양한 장치들을 둔다.

홍보 기능을 방어선으로 두고 경영자는 필요한 상황에만 제한적으로 나서는 고전적 방식이 있고 사업 현안과 경영자 개인을 분리해 호감을 확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업 현안에 대해 이사회 회의록을 공개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빌 게이츠 창업자의 방침을 직접 밝히는 부담을 피하고 이사회의 다양한 논의를 이용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간결 명확한 소통은 군대 관등성명이나 수업 시간 발표에는 맞지만 최고경영자(CEO)의 일은 아니다. 전략적 고려가 반영된 건설적 모호함(constructive ambiguity)을 전략 고수의 필수 아이템으로 갖추시라.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