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끈한 인맥 자랑하는 일본 명문 대학들, 학벌 폐해 부각되며 히타치는 '脫도쿄대 선언'

[글로벌 현장]
'동문끼리만 정보 교환'…日 재계 움직이는 학벌
학벌은 파벌, 옛 재벌과 함께 일본 재계를 상징하는 ‘3벌(閥)’ 중 하나다. 지난해 일본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은 51.1%. 대학 진학에 뜻을 두지 않는 고교생이 절반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한국 못지않은 입시 경쟁을 치른다. 학벌이 대학 졸업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학벌의 대명사는 명문 사학 게이오대다. 게이오대 동문회인 ‘미타회’는 도쿄대교우회, 히토쓰바시대 조스이회, 와세다대 도몬회 등 명문대 동문회 가운데 결속력과 기업·산업계의 세력 면에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이오대의 전형 ‘한자와 나오키’ 주인공들
미타회라는 이름은 본교가 있는 도쿄 미나토구 미타캠퍼스에서 따왔다. 종합본부 격인 게이오연합미타회 산하에는 졸업 연도별·지역별·업종별·기업별로 800개 이상의 미타회가 결성돼 있다. 회원수는 38만 명에 달한다.

해외 지부도 있어 한국에도 게이오대 한국미타회, 서울미타회 등이 있다. 손목시계로 유명한 세이코홀딩스의 핫토리 레지로 사장이 1987~2013년 25년 동안 게이오연합미타회 회장을 맡았다.

기업에 입사하면 인사 담당자보다 미타회 선배가 먼저 찾아온다고 할 정도로 게이오대 인맥의 끈끈함은 정평이 나 있다. 일본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한 ‘한자와 나오키’에서 강력한 결속력을 과시하는 등장인물들이 게이오대 출신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드라마의 대사에 등장하는 ‘라면지로’는 게이오대 정문 앞에 실제 있는 유명 라면 가게다. ‘한자와 나오키’의 원작자인 이케이도 준도 게이오대 법학부 졸업생이다.

게이오대 출신 부동산업계 관계자들이 결성한 부동산미타회는 미타회 회원끼리만 물건 정보를 주고받는 ‘미타회 한정’도 흔하다. 미타회 소속으로 부동산 투자 자문 회사를 경영하는 야마다 스미오 대표는 요미우리신문에 “옥석이 혼재돼 있는 부동산을 매매할 때 상대를 신뢰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상대가 미타회 소속이라는 것만으로 크게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업종별로는 공인회계사미타회와 미타법조회가 5470명과 3687명의 회원을 보유해 최대 규모다. 이 밖에 우주미타회·영화미타회·인쇄미타회·자민당국회미타회·정육미타회·선장미타회·창고미타회·도쿄증권미타회·문구미타회·불교미타회·여관미타회 등 다양한 미타회가 존재한다.

기업별로도 200개 이상의 미타회가 있다. 히타치(2000명),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1500명), 후지쓰(1117명), 노무라홀딩스(1038명), 도요타·도시바(각각 1000명) 등의 미타회가 특히 크다.

시장 조사 회사인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2019년 6월 기준 상장 기업 사장의 출신 대학은 게이오대가 264명으로 가장 많았다. 187명과 175명의 와세다대와 도쿄대를 크게 앞섰다. 대형 백화점인 미쓰코시는 사장을 8대 연속 게이오대가 독점하기도 했다.

기업 재편에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다. 2015년 가고시마은행과 구마모토현의 히고은행이 통합해 규슈파이낸셜그룹이 출범했다. 두 은행의 행장이 1975년 게이오대 상학부를 졸업한 동기생이어서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애시당초 게이오대는 일본 학벌의 원조다. 1900년 전후 미쓰이은행(현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의 임원이었던 나카미가와 히코지로가 모교인 게이오 졸업생을 다수 채용한 것이 본격적인 학벌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국제 거래가 크게 늘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이던 시기였다.
세이케이대 졸업생 매년 1800명 미쓰비시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출신 학교로 유명한 세이케이대는 미쓰비시그룹과 관계가 깊다. 1912년 세이케이학원을 창설할 때 미쓰비시 재벌의 4대 총수인 이와사키 고야타가 자금을 댔다.

이 인연으로 미쓰비시그룹은 전통적으로 세이케이대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해 왔다. 최근 들어서도 매년 1800여 명이 미쓰비시그룹에 입사한다. 세이케이학원 이사장도 미쓰비시그룹 계열사의 중진이 맡는 것이 관례다.

아베 전 총리와 형인 아베 히로노부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세이케이를 나왔다. 형 히로노부는 미쓰비시상사에서 임원을 역임했다.

세이케이대는 2013년 ‘마루노우치비즈니스연수(MBT)’라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가동해 미쓰비시 입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마루노우치라는 이름 자체가 미쓰비시그룹의 본거지인 도쿄 마루노우치에서 나왔다.

경쟁률이 3 대 1 정도인 학내 선발 과정을 통과한 3학년생 30명이 미쓰비시 각 계열사 20여 곳에서 취업 체험을 받는다. 지난 6년간 참가자 전체의 20%가 미쓰비시에 입사했다.

‘일본의 하늘은 도쿄대 항공학과가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2020 년 9월로 100년을 맞은 도쿄대 항공우주공학과는 하늘과 우주를 꿈꾸는 학생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최단 루트로 알려져 있다.

야마사키 나오코, 노구치 소이치 등 일본이 배출한 우주 비행사 4명이 모두 도쿄대 항공우주공학과 출신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2013년 제작한 애니메이션 ‘바람의 분다’의 실존 모델로 일본 항공기 산업의 아버지인 호리코시 지로도 도쿄대의 전신인 도쿄제국대학 항공학과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탁월한 성능으로 미군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던 ‘제로센’을 설계했다.

전후에는 미쓰비시중공업에 입사해 일본산 여객기인 ‘YS-11’의 설계를 맡았다. 혼다제트와 미쓰비시스페이스제트 등 일본 항공기 개발 인재들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의 항공기 제조 자회사 초대 사장인 도다 노부오 씨는 “항공기 메이커뿐만 아니라 국토교통성과 항공 회사 등 항공 산업 전체에 네트워크가 퍼져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고도 성장기 학벌의 결속력은 기업의 일체감과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일본에서도 학벌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제도적으로도 학벌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시스템이 마련되는 추세다.

일본 금융청은 상장 기업의 기업 지배 구조 지침을 통해 사장 등 임원 인사를 지명위원회가 판단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사외이사들이 주도하는 지명위원회가 인사권을 쥐게 되면 학벌과 파벌이라는 요소가 우선 순위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일본 최대 경제 단체인 게이단렌은 신입생 일괄 채용 관례 대신 연중 경력직을 채용하는 방식으로 취업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졸업생들이 출신 학교를 찾아다니며 취업 전선에 뛰어든 후배들을 끌어주는 신입생 일괄 채용은 학벌의 입구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입구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신입생 일괄 채용 개선을 주도한 나카니시 히로아키 전 게이단렌 회장의 친정 히타치에서도 ‘탈(脫)도쿄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10명의 히타치 사장 가운데 8명이 도쿄대 공학부 출신이었다.

이달 신임 사장에 선임된 히가시하라 도시아키는 도쿠시마대 공학부를 졸업했다. 나카니시 당시 게이단렌 회장은 지난해 5월 정례 기자 회견에서 “히타치에서 학벌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젊은 세대의 의식도 바뀌고 있다. 기업별 미타회에서는 월 수천 엔(약 수만원)의 회비를 내지 않고 동문회에도 출석하지 않는 젊은 사원이 늘고 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사내 통신망에 신입 사원의 출신 학교를 게재하지 않아 신입 회원을 파악하기 어려운 기업도 늘고 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