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한 1970년대생, 한국 대기업 주축으로 두각…MZ세대와 소통하는 가교 역할 기대

[비즈니스 포커스]

기업 문화를 바꾸는 주역으로 ‘X세대’가 부상하고 있다. ‘1990년대생’으로 대표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기업 문화가 바뀌어 가는 와중에 기업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리더 세대들까지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중이다. 삼성과 LG 등 주요 그룹들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은 이미 1970년대생 임원들을 대거 발탁하고 있고 최근에는 ‘1970년대생 대표이사(CEO)’의 등장도 부쩍 잦아지고 있다. 기업들이 ‘1970년대생 임원’을 공격적으로 전진 배치하는 데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후 유독 빨라지고 있는 디지털화를 비롯한 비즈니스 환경 변화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이유가 크다. 이와 함께 MZ세대와의 소통에 ‘가교 역할’을 맡아 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기업 중심축 ‘세대교체’

대기업 임원들 가운데 X세대의 등장은 사실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이미 지난해부터 X세대는 주요 대기업들의 주축 세대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CXO연구소가 지난 9월 발간한 ‘국내 주요 5대 기업 2021년도 신임 및 퇴임 임원 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올해 초 단행된 2021 상반기 인사에서 주요 5대 기업(삼성전자·현대자동차·SK하이닉스·LG전자·포스코)의 신임 임원 10명 가운데 4명은 외환 위기 때 대학을 졸업한 1971~1975년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 주요 5대 기업 총 임원 수 2070명 가운데 지난해 말 이후 진행된 2021년 인사에서 처음으로 임원이 된 이들은 330명이었다. 신임 임원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올해 50세가 되는 1971년생이 42명으로 가장 많았고 1975년생부터 1968년생까지 각 연도마다 20명이 넘는 임원들이 발탁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2021년 새롭게 임용된 임원 10명 중 6명을 1970년대생 젊은 임원들로 채웠고 LG전자도 1970년대생 임원이 지난해 82명에서 올해는 113명으로 늘었다.

이는 한국 100대 기업으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10월 20일 글로벌 헤드헌팅 전문 기업 유니코써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00대 기업의 임원 수는 총 6640명이다. 기업들의 임원 수로만 따진다면 여전히 ‘베이비부머 막차’ 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60~1964년생이 가장 많다. 하지만 2018년 이후 1970년대 출생 임원의 숫자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올해 처음으로 30%를 넘어선 것으로 분석됐다. 팬데믹으로 인해 대기업 임원 수가 전년 대비 200여 명 이상 줄어든 가운데서도 ‘1970년대생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1970년대생 최고경영자(CEO)의 발탁도 늘고 있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계열사 사장단 중 3명을 ‘X세대 사장’으로 발탁했다. 박승덕 한화솔루션 전략부문 대표(1970년생), 박흥권 한화종합화학 사업부문 대표(1971년생) 그리고 김은희 한화역사 대표(1978년생)다. SK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SK E&S에 1974년생인 추형욱 사장을 발탁해 ‘파격 인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추 사장은 특히 임원에 선임된 지 만 3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기존 기업 문화가 빠르게 바뀌어 가면서 ‘능력과 성과’를 중시하겠다는 인사 원칙이 반영된 결과다. 롯데그룹에서는 올해부터 중책을 맡게 된 박윤기 롯데칠성음료 대표가 1970년생이다. 보수적인 금융그룹에서도 1970년대생 CEO의 탄생은 예외가 아니다. 지난 7월 취임한 이은형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겸 하나금융투자 사장은 1974년생이다.
임원 승진 3년 만에 공동 대표에 발탁되며 화제를 모았던 추형욱 SK E&S 공동대표. / 출처=연합뉴스
임원 승진 3년 만에 공동 대표에 발탁되며 화제를 모았던 추형욱 SK E&S 공동대표. / 출처=연합뉴스
이와 같은 기조는 올 연말 2022년 인사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재계 3~4세 ‘젊은 경영인 총수’들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한국 주요 기업들의 임원 역시 1960년대생에서 1970년대생으로 빠르게 중심축이 바뀌고 있다”며 “ 올 연말 임원 인사에서는 1960년대생 임원의 퇴진과 함께 1970년대생 임원들의 발탁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X세대 ‘젊은 리더십’, 기업 문화 바꾼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10개의 트렌드 중 하나로 ‘엑스틴 이즈 백(X-teen is back)’을 꼽았다. ‘X세대’는 일반적으로 베이비붐 이후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를 일컫는다. 베이비붐 세대인 부모 밑에서 비교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자란 X세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개성을 추구했던’ 세대이자 동시에 외환 위기로 인한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 온 세대이기도 하다. 또 독재 정권을 민주 정부로 교체시킨 정치사적 격변기에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변화를 만들어 낸 주역이다. 이와 같은 X세대가 40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의 ‘허리’로서 기존과는 다른 파급력을 지니는 세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X세대의 파급력은 소비 시장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실질적으로 기업을 이끌어 가는 ‘젊은 리더’의 반열에 오른 X세대의 역할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며 사회에 진출한 X세대는 지금까지 베이비부머 세대와 MZ세대 사이에서 신구 갈등을 온몸으로 받아낸 ‘낀 세대’다. 선수로 뛰면서 동시에 신구 세대의 소통을 잇는 가교 역할까지 도맡는 ‘조직의 중추’라는 얘기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10대 시절을 보냈던 만큼 ‘디지털 격변의 시대’를 맞아 업무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위기를 관리하고 신산업으로의 전환을 이끄는 데도 유리하다는 평가다.

‘X세대’ 젊은 리더십이 전면에 부각되며 대기업들의 기업 문화 또한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이은형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겸 하나금융투자 사장이 대표적이다. 지난 3월 인사 당시만 해도 ‘증권업계 첫 40대 사장으로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을 모았던 이 부회장은 취임 후 지금까지 조용하지만 파격적인 ‘내부 혁신’을 이어 가며 호평을 받고 있다. 먼저 하나금융투자는 지난 6월부터 ‘복장 전면 자율화’를 전면적으로 시행 중이다. 직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 이 부회장이 직접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 최연소 CEO답게 직원들과 소통하는 방식도 주목받고 있다. 회의 때 사용하는 각종 종이 문서를 전자 문서로 대체하고 ‘페이퍼리스(paperless)’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임원들뿐만 아니라 과장급 실무자들도 회의에 배석해 주제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며 자유롭게 토론을 벌인다. 임직원들과 폭넓은 소통을 위한 ‘도시락 미팅’도 업계의 화제다.
증권업계 최연소 CEO로 화제를 모았던 1974년생 이은형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겸 하나금융투자 대표 이사 / 사진=하나금융투자
증권업계 최연소 CEO로 화제를 모았던 1974년생 이은형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겸 하나금융투자 대표 이사 / 사진=하나금융투자
애경그룹의 지난 연말 정기 인사에서 AK플라자의 수장에 낙점된 김재천 사장은 1973년생으로, 오너를 제외하면 역대 최연소 대표다. 발령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국의 백화점과 쇼핑몰을 도는 일이었다. 만나는 직원들마다 감사 문구를 붙여 직접 제작한 비타민 음료를 건네며 소통을 시작했다. 업무 스타일도 젊어졌다. 각 사업부장과 캘린더 애플리케이션으로 일정을 공유하고 수시로 화상 회의를 연다. 업무 중 궁금한 것이 생기면 신입 직원들에게도 메신저를 통하거나 직접 찾아가 궁금증을 해결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1970년대생은 ‘교량 세대’로,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세대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해 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며 “기업에서도 1970년대생 임원들이 점점 더 부각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교량 세대’로서의 역할과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