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노 세루티에서 패션 능력 발전…1974년 자신 이름 건 첫 컬렉션 대성공, 날로 번창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조르지오 아르마니 ①
사진=조르지오 아르마니. 어린이의 모습은 1936년 두 살 때의 아르마니. 보그
사진=조르지오 아르마니. 어린이의 모습은 1936년 두 살 때의 아르마니. 보그
2000년 10월 20일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25년 패션 왕국 업적을 기린 전시회가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렸다. 미술을 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를 마땅하지 않게 여겼다. 미술관에서 패션 전시가 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장은 아르마니를 코코 샤넬, 이브 생 로랑 다음으로 20세기 패션 디자이너를 대표한다고 생각해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가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왜 전시회를 개최했을까. 아르마니가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한 시대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르마니는 1934년 7월 11일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좀 떨어진 피아첸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운송회사 간부였고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아르마니도 아버지를 닮아 영화를 즐겨 봤고 그의 패션은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가 나치 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아르마니는 많은 시간을 영화를 보면서 보냈다. 아버지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아르마니에게 끼친 영향은 2015년 4월 아르마니가 그의 경력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밀라노에 ‘아르마니-실로스’ 건물을 세우고 필름 시리즈를 전시 상영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제대 후 백화점 쇼윈도 디스플레이로 인정 받아
사진=피터 린드버그가 촬영한 아르마니 광고. 사진:armani
사진=피터 린드버그가 촬영한 아르마니 광고. 사진:armani
가족들은 아르마니가 꼼꼼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가족의 바람대로 아르마니는 밀라노대 의학부에 입학했고 2년 후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시 포토그래퍼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제대 후 진로를 바꿔 밀라노에 있는 리나센테 백화점에서 쇼윈도 디스플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디스플레이 실력을 인정받아 바이어 부서로 옮기게 됐다. 그 후 바이어로 6년을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소재와 고객을 다루면서 마케팅을 공부했다.

1961년 직물에 대한 안목을 키운 덕분에 ‘니노 세루티’에서 그를 보조 디자이너로 고용했다. 그 당시 니노 세루티는 그 시대 남성들이 원하는 보수적인 옷을 만들고 있었다. 니노 세루티는 젊은 아르마니에게 패션 세계를 알려줬다. 그는 소재와 생산 시스템에 대해 알게 됐다. 일하는 동안 그는 잘 만들어진 엘레강스한 옷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니노 세루티에서 7년 일하는 동안 그의 능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봉재·패턴·소재에 능숙한 실력 있는 디자이너의 기본을 익혔다.

니노 세루티에서 일할 때 아르마니에게 격려하고 희망의 길을 열어 준 것은 세르조 갈레오티라는 친구였다. 그는 아르마니에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근사한 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줬다. 아르마니 디자인의 원동력은 그의 경력이다. 아르마니는 1970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며 알레그리(스포츠 웨어와 레인코트), 비구타(셔츠), 시콘스(가죽 웨어), 엠마뉴엘 웅가로, 에르메네질도 제냐 등의 옷을 디자인했다.

아르마니가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컬렉션을 선보인 때는 1974년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남성 슈트는 어깨에 딱딱한 패드를 넣은 역삼각형의 실루엣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르마니는 과감하게 어깨 패드를 뺀 부드러운 남성 실루엣을 연출함으로써 첫 컬렉션부터 인기를 얻었다. 컬렉션 발표 1년 후인 1975년 7월 24일 열성적이고 야망에 차 있던 젊은 건축가인 세르조 갈레오티와 아르마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S.P.A’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사무실을 차려 시작했지만 회사 첫 컬렉션인 1976년 봄·여름 컬렉션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성공을 거둔 뒤 사업이 나날이 번창해 나갔다.

1000만 리라의 자본금으로 시작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S.P.A’는 첫 컬렉션을 마친 후 원금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1년 후 총매출액은 5억6900만 리라가 되는 신화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성복을 디자인했던 아르마니가 여성복에 도전한 것은 큰 모험이었다. 남성복 디자이너가 여성복으로 성공한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타일의 본질은 복잡한 어떤 것을 단순화하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기면서 여성복에 도전했다.

여성복으로의 도전은 성공으로 이어졌고 아르마니를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여성복 컬렉션의 모델들은 마치 남자 형제들의 재킷을 입은 듯 보였고 소재도 남성복에 사용하는 것들을 썼다. 아르마니의 여성복 재킷은 심플하고 소프트하며 남성복의 느낌이 물씬 풍겨났다. 이탈리아 남성복의 말쑥함과 편안함이 아르마니 여성 재킷에 적용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정립했다.

리처드 기어 등 할리우드 남자 배우 사이 인기 1위
사진=‘아르마니·실로스’에 전시된 아르마니 컬렉션. 사진: armani
사진=‘아르마니·실로스’에 전시된 아르마니 컬렉션. 사진: armani
당시 사회 분위기 역시 아르마니의 편이었다. 1970년대 말 높아지는 사회적 지위에 비해 여성들의 옷은 거추장스러운 주름 장식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커리어 우먼들은 심플하고 간결하며 활동적이기까지 한 아르마니 슈트에 열광했다. 첫해의 성공 이후 아르마니는 매장을 유럽으로 확대했다. 3년 동안 아르마니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주문 양이 너무 많아 자체 생산이 불가능해 1978년 GFT(Gruppo Finaziario Tessile)와 라이선센스를 맺었다. 지독한 일중독자인 아르마니는 남성·여성 컬렉션의 성공 후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해 주니어용 의상, 언더웨어, 액세서리 라인까지 확대했다.

보통의 디자이너들은 어느 정도 성공하면 꿈의 무대인 파리를 욕심내지만 아르마니는 ‘USA 조르지오 아르마니 남성복 회사’를 내고 미국 시장에 집중했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79년 아르마니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니먼 마커스 상을 수상했다.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 출연한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담당하면서 아르마니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딱딱하지 않은 어깨, 좁은 라펠과 꼭 맞는 허리, 부드러운 소재와 절제미가 돋보이는 슈트를 착용해 섹시함이 돋보였다.

이 영화 이후 아르마니 슈트는 남자 배우들이 찾는 1순위가 됐다. 조디 포스터, 미셸 파이퍼,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 다이아나 로스 등이 1980년대 오스카 시상식에서 아르마니 드레스와 슈트를 입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오프닝을 연 스티브 마틴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아르마니를 입었군요!”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참고문헌 :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조르지오 아르마니에 관한 연구(전수경,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