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주석 장기 집권 구성과 연결…빅테크 견제 지속될 듯

[글로벌 현장]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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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이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 구상과 연결된 셋째 ‘역사 결의’를 채택했다. 이번 역사 결의는 공산당 100년의 역사를 세 단계로 분류해 시 주석을 마오쩌둥·덩샤오핑 시대에 이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제3대 영도자의 반열에 올리는 내용을 담았다.
이전 지도자들과 차별화…개혁·개방 정책도 비판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지난 11월 11일 폐막된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 전회)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역사 결의)’를 채택했다.

이번 역사 결의는 중국 공산당의 100년 사상 셋째이자 1981년 2차 결의 이후 40년 만에 나온 것이다. 첫 역사 결의는 1945년 제6기 7중 전회에서 채택된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로, ‘마오쩌둥 사상’에 당 지도 사상의 지위를 부여하는 동시에 마오쩌둥 이전 당 지도자들의 과오를 총결산했다. 마오쩌둥이 친소련파와의 권력 투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한 것도 이때다.

둘째 역사 결의는 1981년 제11기 6중 전회 때 채택된 ‘건국 이후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로, 덩샤오핑의 개혁 노선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마오쩌둥의 최대 실정으로 꼽히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비판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대의 과오를 ‘좌경향 편향 오류’로 규정하면서 개혁·개방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중화권 매체들은 이번 역사 결의가 내년 가을 제20차 공산당 당 대회에서 결정될 예정인 시 주석의 3연임(각 임기는 5년)에 앞선 ‘정지 작업’ 성격을 띤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앞서 10년씩 집권했던 장쩌민과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들은 덩샤오핑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됐다. 시 주석을 직전 지도자들과 차별화해 ‘임기 10년’ 관행을 깨고 장기 집권할 수 있는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번 역사 결의의 분량은 약 3만6000자다. 1, 2차 역사 결의가 각각 2만7000여 자, 3만4000여 자인 것과 비교하면 3차 역사 결의의 분량이 가장 많다.

3차 역사 결의는 서문, 신민주주의 혁명의 위대한 승리,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과 사회주의 건설 추진, 개혁·개방 진행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신시대 창립, 중국 공산당 100년 분투의 역사 결의, 중국 공산당 100년 분투의 역사 경험, 신시대 중국 공산당 등 총 8개 주제로 구성됐다.

특히 시 주석의 집권 1기부터 현재까지 통치 여정을 담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신시대 창립’ 부분은 전체 분량의 절반이 넘는 1만9200여 자를 차지했다.

마오쩌둥이 이끈 ‘신민주주의 혁명기’와 ‘사회주의 혁명 건설기’는 합쳐서 5500여 자, 덩샤오핑이 시작해 장쩌민·후진타오가 이어간 것으로 규정한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새 시기’는 4100여 자에 그쳤다.

문화 대혁명(1966∼1976년)과 대약진 운동에 대해선 2차 역사 결의와 마찬가지로 ‘재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마오쩌둥의 과오로 평가했다.

또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개방 정책의 부작용들도 거론했다. “개혁·개방 이후 배금주의, 향락주의, 극단적인 개인주의, 역사 허무주의 등 잘못된 사상 경향이 불시에 등장했고 인터넷 여론이 매우 혼란스럽다”는 지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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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주석 중심 ‘집중 통일 영도’ 명시
이번 역사 결의는 반부패와 개혁 등을 요구한 대학생 중심의 시민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낳은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정치 풍파’, ‘동란’ 등으로 표현했다. 2차 역사 결의가 개혁·개방 초기인 1981년 나왔기 때문에 1989년 톈안먼 사태에 대한 역사 결의상 기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격변했다”며 “국제 사회 반(反)공산주의·반사회주의 적대 세력의 지지와 선동으로 인해 국제적인 큰 기류와 국내의 작은 기류는 1989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를 초래했다”고 기술했다.

2차 역사 결의에 포함됐던 ‘개인 숭배 반대’와 ‘집단 지도’ 문구는 이번에 빠졌다. 그 대신 시 주석 집권 이후 당이 강조해 온 ‘집중 통일 영도’라는 표현이 명시됐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이 주도해 장쩌민 전 주석 집권기(1993∼2003년)부터 정착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가 점점 퇴색하고 시 주석에 집중된 의사 결정 시스템이 굳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번 결의에서 시 주석을 당 또는 당 중앙의 ‘핵심’으로 표현한 대목이 9차례 등장한다. 또 ‘집중 통일 영도’는 총 7차례 등장한다. 결의는 “당 중앙의 집중 통일 영도는 당의 영도의 최고 원칙이며 당 중앙 집중 통일 영도를 강화하고 수호하는 것은 전당 공동의 정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문일현 중국 정법대 교수는 “내년 20차 당대회 이후 중국 공산당은 집단 지도 체제가 아닌 집중 통일 지도 체제로 운용되고 새로운 지도 체제는 ‘핵심’인 시 주석이 중심이 돼 통치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역사 결의는 개혁·개방 이후 발생한 각종 문제점을 해소할 방법으로 ‘공동 부유’ 정책 등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제시했다. 결의는 “당이 시진핑 동지의 당 중앙 핵심, 당 핵심 지위, 시진핑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지도적 지위를 확립한 것은 전 군과 전 인민의 공통된 염원을 반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시진핑의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은 당대 중국 마르크스주의, 21세기 마르크스주의이자 중화문화와 중국 정신의 시대적 정수로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의 새로운 도약을 이뤄냈다”고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를 21세기 중국에 맞게 현지화한 사상이 시진핑 사상이라는 취지다.

세부적으로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경제 분야 문제의 해법으로 시 주석의 주요 어젠다인 ‘공동 부유’를 제시했다. 이 단어는 결의에 5차례 등장한다. ‘공동 부유’의 기치 하에 추진해 온 빅테크(거대 정보기술 기업) 규제 강화, 부동산 보유세 도입 추진 등의 정책 기조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을 예고한 것으로 풀이된다.

공산당은 이번 역사 결의 전문을 시 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간의 영상 정상 회담이 열린 11월 16일 공개했다. 최강대국인 미국의 정상에게 당당히 맞서 주장할 바를 주장하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부각되는 날에 맞춰 시 주석의 치적과 역사적 지위를 강조한 역사 결의 전문까지 공개해 정치적 효과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中 공산당 셋째 ‘역사 결의’, 미·중 정상회담 날 공개 [글로벌 현장]

5년 동안 7번 열리는 ‘중전회’
중국 공산당은 5년에 한 차례 가을에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열어 지도부를 결정한다.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중전회)는 통상 5년 동안 총 7차례 열린다. 9500만 명의 공산당원 중 핵심인 370여 명의 중앙위원과 후보 위원이 한자리에 모인다. 공산당 수뇌부인 중앙위원회는 당 지도부 인사, 정부 각 부처 장관, 31개 성·시 수뇌부, 고위 장성, 대형 국유 기업 경영진 등으로 구성된다.

당대회 직후의 1중 전회는 지도부 중에서도 핵심인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과 7명의 상무위원을 뽑는다. 이듬해 초 2중 전회에선 국가 기구의 주요 인사를 결정한다. 같은 해 3중 전회와 이듬해 4중 전회는 주요 정책을 논의하고 4년 차 5중 전회에선 차기 5개년 경제 계획을 심의한다. 6중 전회는 특별한 고정 안건은 없지만 보통 중앙위 상무위원 등 차기 지도부의 윤곽이 정해졌다. 7중 전회는 당대회 직전에 열려 주요 안건을 정리한다.

2016년 6중 전회에선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핵심’이란 말은 덩샤오핑과 장쩌민에게 쓰였지만 후진타오 전 주석에게는 붙지 않은 표현이다. 중국 공산당 특유의 집단 지도 체제가 시 주석 1인 체제로 바뀌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베이징(중국)=강현우 한국경제 특파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