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대우조선·안진, 국민연금에 515억 배상하라”
증권사는 기관들 손실에 책임 없다 판결

[법알못 판례 읽기]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전경. 사진=연합뉴스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전경. 사진=연합뉴스
분식회계를 저지른 대우조선해양의 회사채 발행을 주관했던 증권사들이 법원으로부터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판단을 받았다.

당사자인 대우조선해양과 외부 감사를 맡은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이 기관투자가들이 제기한 주식·채권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잇달아 패소하는 가운데 나온 판결이다.

부주의로 분식회계를 알아채지 못한 채 대우조선해양의 채권 발행을 도와 기관들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을 받아 왔던 증권사들이 약 5년 만에 결백을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분식회계로 증권사도 허위 기재 알 수 없어”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민사부(부장판사 강민성)는 2022년 1월 말 국민연금이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발행 주관·인수 업무를 맡았던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DB금융투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같은 날 또 다른 피고인인 대우조선해양과 딜로이트안진에는 배상금 515억원을 공동으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우조선해양의 회사채 투자 손실에 대해 증권사들의 책임이 없다고 선을 긋는 판례가 나온 것이다.

재판부는 “증권사들은 상당한 주의를 했음에도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로 재무제표 중 중요 사항이 거짓으로 기재된 사실을 알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이들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국민연금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3600억원어치를 발행 시장과 유통 시장에서 사들였다. 이후 대우조선해양이 2012~2014년 실적 등을 부풀린 것이 드러나면서 대규모 손실을 보게 됐다.

국민연금은 보유 중인 회사채 중 20억원어치를 15억원에 매도했고 나머지 3580억원어치 중 절반인 1790억원가량은 출자 전환을 거쳐 주식으로 보유하게 됐다. 국민연금은 이 주식을 팔았지만 회수 금액은 991억원에 그쳤다.

국민연금과 똑같은 일을 겪은 우정사업본부·수출입은행·공무원연금·삼림조합중앙회 등 다른 기관도 대우조선해양을 상대로 줄줄이 손해 배상 소송을 걸었다. 해당 기관들 중 국민연금·공무원연금·중소기업중앙회·삼림조합중앙회는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발행 주관을 맡은 증권사들을 상대로도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기관들은 “증권사들이 실사를 진행하고도 증권신고서에 ‘회사채 원리금 상환은 무난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적었다”며 “증권신고서상 거짓 기재 등이 없었다면 대우조선해양 회사채를 사지 않거나 더 싸게 취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관투자가들은 대우조선해양 회사채를 사들였다가 회사가 2012~2014년 실적 등을 부풀린 것이 드러나면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 사진=연합뉴스
기관투자가들은 대우조선해양 회사채를 사들였다가 회사가 2012~2014년 실적 등을 부풀린 것이 드러나면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 사진=연합뉴스
남은 소송에서도 결백 입증되나

증권사들은 주간사 회사로서 책임을 다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전략을 통해 결백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2017년 4월 해당 소송이 제기된 후 법무법인 율촌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오랫동안 변론을 준비했다.

특히 주간사 회사로서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실사를 했다는 것과 대우조선해양의 재무제표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를 통해 재판부를 설득했다.

허진용 율촌 변호사는 “재무제표처럼 전문가가 만든 정보는 의심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잘못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꼭 과실로 볼 수는 없다”며 “당시 증권사들이 대우조선해양의 회사채 발행을 주관하면서 모범 규준에 맞춰 실사한 내역과 관련 자료를 최대한 모아 주장을 입증했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선 증권사가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 발행을 주관·인수할 때 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면 당시 발행 기업이 분식회계처럼 주식·채권 가격을 떨어뜨릴 만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책임이 없다는 판례가 생겼다고 보고 있다.

2011년 국내 증시에 입성한 지 2개월 만에 분식회계로 상장 폐지됐던 중국고섬공고유한공사(중국고섬) 사건은 상장 주간사 회사도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와 증권업계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약 4년에 걸쳐 진행된 이 재판은 2020년 대법원이 원심을 뒤집고 상장 주간사 회사인 미래에셋증권과 한화투자증권에 과징금 20억원씩을 부과했다.

중국고섬 사건과 달리 “과실이 없다”는 판결을 받으면서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발행 주간사 회사들은 남은 소송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이들은 현재 공무원연금·산림조합중앙회·중소기업중앙회가 제기한 소송에서도 피고인에 포함돼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그동안 딜로이트안진과 마찬가지로 증권사들도 대우조선해양을 도왔다는 인식이 적지 않았는데 이번 판결로 증권사들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며 “예정돼 있는 다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증권사들이 결백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돋보기]
기관들, 대우조선 상대로는 줄줄이 승소

기관투자가들은 대우조선해양을 상대로 건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선 줄줄이 승소하고 있다. 기관들이 남은 소송에서도 모두 승소한다면 대우조선해양 측이 부담할 배상금만 2000억원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0부(한성수 부장판사)는 2021년 2월 대우조선해양과 고재호 전 대표, 김갑중 전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이 국민연금(413억원), 교직원연금공단에 57억여원, 공무원연금공단에 29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같은 법원 민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지숙)도 우정사업본부를 운영하는 국가에 112억여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기관들의 주식 투자 관련 손해 배상 금액만 600억원이 넘었다.

기관들은 회사채 투자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에서도 승소를 이어 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부장판사 한성수)는 올해 1월 말 우정사업본부가 제기한 소송에서 대우조선해양과 고재호 전 대표, 김갑중 CFO가 11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딜로이트안진에 대해서도 배상금 110억원 중 47억원을 부담하라고 했다.

법원은 비슷한 시기 국민연금이 낸 소송에서도 대우조선해양과 안진회계법인에 배상금 515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해당 판결을 낸 서울중앙지법 제21민사부(강민성 부장판사) 재판부는 “증권신고서와 사업보고서 등에 포함된 재무제표, 사업보고서에 첨부된 감사보고서는 채권 발행 회사의 재무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라며 “국민연금이 회사채를 취득할 때 재무제표를 참고하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채 매수와 분식회계 사이엔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국민연금과 우정사업본부 외에도 공무원연금·사학연금·중소기업중앙회 등 기관들이 제기한 회사채 투자 관련 손해 배상 소송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남은 소송에서도 기관들이 모두 이긴다면 대우조선해양 측이 부담할 배상금은 2000억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우조선해양은 분식회계를 주도한 경영진과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분식회계로 실적이 부풀려지면서 당시 임원들이 대규모 성과급과 이익 배당금을 받아간 것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다.

올해 2월 초 열린 1심에선 재판부가 고 전 대표와 김 전 CFO가 대우조선해양에 850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 전 CFO에 대해선 별도로 202억여원을 추가로 내라고 명령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