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조원 투자 예고 TSMC·공격적 M&A 나선 인텔…현금 100조원 쥔 삼성, ‘빅딜’ 가능성은

[비즈니스 포커스]
인텔의 미국 오레곤 반도체 공장. 사진=인텔 제공
인텔의 미국 오레곤 반도체 공장. 사진=인텔 제공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반도체 공급망 확보가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각국이 천문학적인 투자에 나서면서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날로 가열되고 있다.

그 무엇보다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와 함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쩐의 전쟁’이 치열하다. 바이든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미국의 인텔은 반도체 관련 기업의 M&A에 속도를 내고 있고 대만의 TSMC도 반도체 생산 설비 등에 투자를 확대하며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삼성의 고민 또한 깊어지고 있다. 반도체 패권 경쟁의 승기를 잡기 위한 반도체 M&A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지만 반도체를 둘러싼 자국 기술 보호주의가 강화되면서 반도체 기업 간 M&A에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쩐의 전쟁’
“못 하나가 없어 편자가 사라졌고 편자가 없어 말을 잃었고 결국 전쟁에서 졌다. 반도체는 21세기 편자의 못이다.” 2021년 2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공급 사슬에 대한 대통령 명령’에 서명하며 강조한 얘기다. ‘21세기 편자의 못’이라고 한 바이든 대통령의 비유는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소재인 반도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문제는 반도체가 특정 반도체를 증산하기 위한 생산 시스템을 변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평균 3개월 이상 생산 과정이 소요될 만큼 공정 과정이 극도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급 부족 이슈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바꾸기 위한 글로벌 패권 경쟁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2020년을 기준으로 반도체 제조사 중에서 인텔·삼성전자·TSMC 등 상위 3개사의 매출은 세계 반도체 산업 전체 매출의 49.7%에 달한다. 미국의 인텔과 대만의 TSMC가 공격적인 투자와 M&A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반도체 패권을 지키기 위한 삼성의 ‘넥스트 스텝’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 만큼 현재 가장 뜨거운 투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분야다. 지난 3월 4일 미국의 시장 조사 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반도체 설비 투자액은 1904억 달러(약 23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전년 1539억 달러(약 187조원) 대비 24% 증가했고 5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나 늘었다. 이에 따르면 반도체 설비 투자액은 2020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두 자릿수 이상 성장세를 이어 가는 중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의 반도체 업체 TSMC.  사진=한국경제신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의 반도체 업체 TSMC. 사진=한국경제신문
세계 파운드리 점유율 압도적 1위인 TSMC는 올해에만 440억 달러(약 52조5000억원)의 투자를 집행할 계획이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무려 40% 증가한 투자 규모다. TSMC는 2월 16일 일본 구마모토현에 예정된 첨단 반도체 공장 건설에 당초 계획보다 1800억 엔(약 1조8700억원) 늘어난 9800억 엔(약 10조18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TSMC는 지난해 11월 일본 소니와 협력해 구마모토현에 공동으로 반도체 공장을 건설, 2024년 말부터 월 12인치 웨이퍼 4만5000장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었다. 여기에 세계적 자동차 부품 업체 일본 덴소가 새롭게 참여하고 생산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TSMC 또한 투자 금액을 늘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2020년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 120억 달러(약 14조3500억원)를 투자한 데 이은 대규모 신규 투자다.

지난해 파운드리 진출을 선언한 인텔도 동시다발적인 설비 투자와 M&A를 진행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지난해 220억 달러(약 26조2300억원)를 투입해 미국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공장을 추가 구축할 계획을 밝힌 인텔은 올해 1월 200억 달러(약 23조8500억원)를 들여 미국 오하이오 주에 2개의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인텔은 향후 10년간 1000억 달러를 들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제조 단지로 육성할 계획이다. 이 공장에서 인텔은 자사 첨단 신제품 칩을 생산하고 미세 공정을 적용한 파운드리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인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차량용 반도체 파운드리 진출을 전격 선언하며 전방위적인 사업 확장을 예고하고 나선 상황이다. 지난 2월 15일 이스라엘 파운드리 업체인 타워반도체를 최근 54억 달러(약 6조45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타워반도체는 세계 7~8위 파운드리 업체로, 주로 자동차용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엔비디아가 인수하려다 실패한 영국 반도체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ARM’ 인수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RM은 반도체 설계를 할 때 ‘뼈대’ 역할을 하는 명령어 집합 구조(ISA)를 만드는 회사다. 인텔이 ARM 인수에 성공하면 파운드리 고객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최대한 넓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빅딜’ 준비 중인 삼성, NXP 등 유력 후보군으로 거론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이 연이어 대규모 투자와 굵직한 M&A 거래를 추진하면서 삼성의 다음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빅딜’을 예고한 바 있다. 한종희 삼성전자 DX 부문장(부회장)이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된 ‘세계 가전 전시회(CES) 2022’에서 반도체·모바일·가전 등 전 사업 부문의 M&A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중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것이 차량용 반도체 분야다. 2021년 사상 최대 매출과 함께 인텔을 누르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의 타이틀을 차지한 삼성전자로서는 K-반도체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M&A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재 거론되는 가장 유력한 후보군은 유럽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네덜란드의 NXP와 독일의 인피니언 등이다. 이 가운데 실제 삼성전자는 2019년 NXP 인수를 검토했지만 당시 인수 가격에 이견을 보여 최종 협상이 무산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삼성전자의 NXP 인수설이 다시 나오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IHS마켓에 따르면 차량용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2019년 기준 NXP(21%), 인피니언(19%) 순이다. 현재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는 후발 주자다. 삼성전자가 NXP와 인피니언 둘 중에 한 곳이라도 M&A에 성공하면 단숨에 차량용 반도체 시장 1, 2위로 뛰어오를 수 있다.

이와 함께 두 회사 모두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이 있는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인근에 차량용 반도체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라는 점에서 자동차 최대 시장인 미국 현지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도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파운드리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제공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파운드리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제공
‘대형 딜’을 위한 넉넉한 실탄은 삼성전자의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말 확보한 ‘실탄’은 순현금 기준 105조8100억원에 달한다. 전년 말 104조5100억원 대비 1년 새 1조3000억원이 증가했다. 여기에 차입금과 1년 내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 자산 등을 포함하면 삼성전자가 당장 M&A에 투입할 수 있는 자금은 2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반도체 자국주의’ 바람이 거세지고 있어 삼성전자로서는 공격적인 M&A에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 최근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M&A 승인에 잇달아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최종적으로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무산된 것이 대표적이다. 독과점을 우려한 주요국 규제 당국에 발목이 잡혔다. 지난해 영국 경쟁시장청(CMA)이 엔비디아-ARM의 M&A 관련 1단계 조사에서 “심각한 독과점 우려가 있다”고 밝힌 데 이어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인수 저지를 목적으로 소송을 제기한 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지난 2월 전 세계 실리콘 웨이퍼 3, 4위인 대만의 글로벌웨이퍼스와 독일의 실트로닉 간 M&A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는 소식도 알려졌다. 자국 반도체 산업을 독립적으로 육성하려는 독일 정부가 대만 기업의 독일 기업 인수를 막아선 것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반도체 기업들의 몸값이 매우 오른 상황에서 각국 정부의 규제 리스크까지 겹쳐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가 조심스러운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며 “하지만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에서의 파격적 진전이나 의미 있는 M&A를 통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장착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