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급등하며 시장 얼어붙자 만기·물량 조정…수요 예측에 예상 밖 기관 뭉칫돈 몰려

[마켓 인사이트]
충남 서천에 위치한 한솔제지 장항공장 사진=한국경제신문
충남 서천에 위치한 한솔제지 장항공장 사진=한국경제신문
한솔제지가 창립 후 첫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공개 모집 회사채 시장에서도 시장 수요를 반영한 유연한 조달 전략을 앞세워 기관투자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용 등급이 우량한 기업들도 줄줄이 조달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채 ‘완판’이란 우수한 성적표를 얻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글로벌 공급망 경색이 이어지고 있는 점에서는 우려가 나온다.

“미매각 피하자” 신속한 전략 수정

한솔제지의 올해 첫 회사채 발행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올해 1월 신용 등급 평가까지 마치는 등 회사채 발행을 위한 준비를 모두 끝냈지만 대내외적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본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한 터라 기관투자가들의 투심이 급격하게 얼어붙는 상황이었다. 국내외 시장 금리가 빠르게 치솟으면서 대기업그룹 계열사들마저 기관투자가들의 수요를 확보하지 못했다.

조달 여건이 비우호적이더라도 회사채 발행을 강행하는 기업은 많다. 예정된 조달 계획을 갑작스럽게 변경하면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시장 참여자들에게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한솔제지는 달랐다. 충분히 시장의 상황을 살펴본 후 불확실성이 조금이라도 완화됐을 때 조달 일정을 재개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 결정에는 회사채 발행의 대표 주간사 업무를 맡은 KB증권·신한금융투자·키움증권·한국투자증권의 의견도 적극 반영됐다. 회사채 발행 관련 대표 주간사 업무를 맡은 증권사들은 유연하게 시장 상황에 대응했다.

당초 1000억원의 회사채 발행을 준비했지만 과감하게 물량을 절반 수준으로 축소했다. 기존 3년과 5년으로 계획했던 회사채 만기 역시 2년과 3년으로 수정했다. 금리 인상기에는 상대적으로 단기물이 시장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회사채 중 일부는 한솔제지의 첫 ESG 채권 발행이었던 만큼 증권사들은 더욱 발행 과정에 공을 들였다. 5년 만기 700억원 발행을 고려했던 ESG 채권은 2년 만기 300억원으로 크게 규모를 줄였다. 과감하고 유연한 조달 전략은 적중한 셈이다.

올해 1월에서 3월 중순으로 연기한 회사채 발행은 성공적이었다. 500억원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사전 진행한 기관투자가 대상 수요 예측에서 총 1820억원이 모집됐다. 발행 예정 물량의 4배 가까운 투자 수요가 몰린 것이다.

올해 3월은 금리 상승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관투자가들이 투자 결정에 더 신중을 기하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단기화한 회사채 만기와 대폭 축소한 발행 물량 덕분에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수요를 충분히 이끌어냈다. 기관투자가들의 반응이 좋자 한솔제지는 결국 회사채 발행 규모를 1000억원으로 증액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당초 계획한 회사채 발행 규모를 채우게 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시장 상황을 감안해 발 빠르게 조달 전략을 수정하고 기관투자가들의 선호를 적극 반영해 회사채 완판과 평판 관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고 평가했다.

치솟는 해상 운임, 실적에 부담 요인

한솔제지는 오는 4월 환경 플랜트 건설·운영 등의 환경 사업과 제지 플랜트 건설·운영·보전 업무를 하는 한솔이엠이를 흡수·합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해 정기 주주 총회에서 폐기물 관련 사업과 신재생 에너지 사업, 바이오 가스 제조 사업 등을 신규 사업 목적으로 정관에 추가한다.

한솔제지는 정보통신기술(ICT) 발달에 따른 인쇄 용지 수요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산업 용지·감열지 등 고부가 가치 제품의 생산 비중을 확대 중이다. 인쇄 용지는 ICT 발달과 스마트 모바일 기기의 보급으로 수요가 빠르게 줄고 있다. 이에 따라 공급 과잉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 제지 기업들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수급 구조 개선을 위해 설비를 축소하고 있다.

한솔제지 역시 신탄진의 인쇄 용지 라인 일부를 감열지 생산 라인으로 변경하고 백판지 설비를 증설하는 등 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12년 50%를 웃돌던 한솔제지의 인쇄 용지 부문의 매출 비율은 점진적으로 줄어 지난해 30%대 중반을 나타내고 있다.

한솔제지는 한국 제지 산업 내에선 탄탄한 시장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수지인 감열지 부문에선 발 빠른 설비 증설로 글로벌 1위의 생산 능력을 갖췄다. 한솔제지의 지난해 말 기준 최대 주주는 지분 30.49%를 갖고 있는 한솔홀딩스다.

인쇄 용지의 지속적인 수요 감소에도 한솔제지는 산업 용지와 특수 용지 부문의 성장에 힘입어 최근 3년간 1조6000억원 안팎의 매출을 기록했다. 비대면 소비 확산으로 산업 용지 부문의 판지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지난해 한솔제지의 매출은 1조8342억원으로 전년 대비 21.5% 늘었다. 다만 원재료와 물류비용 등 원가 상승으로 영업이익은 35.8% 급감했다. 지난해 한솔제지의 영업이익은 607억원으로 전년 945억원에서 338억원 줄었다.

한솔제지는 펄프·고지 가격, 환율, 국제 유가의 등락에 따른 영업 수익성 변동이 큰 편이다. 다각화된 제품 포트폴리오와 다변화된 판매 지역, 상대적으로 높은 고부가 제품 비중에도 외부 요인으로 인한 원가율 변동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증권사들은 한솔제지의 실적 전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 일단 지난해 4분기 영업 실적이 시장 전망치를 크게 밑돈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류비용 상승분을 수출 판매 가격에 충분히 전이하지 못한 영향이 컸다.

증권사들은 당장 올해 상반기까지는 해상 운임의 강세가 실적 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박종렬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본격적인 회복세는 해상 운임의 안정세가 예상되는 올해 하반기부터 가능할 것”이라며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물류 대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해상 운송비용 상승분을 얼마나 수출 판매 가격에 효율적으로 전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들어 부각되고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경색의 부정적 여파를 제지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받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다 보니 중·단기적으로 한솔제지의 신용도 개선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솔제지의 장기 신용 등급은 현재 ‘A’다. 2015년 이후 별다른 변동 없이 ‘A’를 꾸준히 유지해 오고 있다.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 등 신용 평가사들은 한솔제지가 제지업계 업황 개선과 고가 특수지 생산 확대를 통해 현재 수준보다 부채 비율이 낮아지고 수익성이 높아져야 신용 등급이 상향 조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승구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제품 수요가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에서 벗어나 회복되는 과정에서 원가·비용 부담을 제품 판매 가격에 전이하면 수익성 저하 폭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원자재 시황과 구매 전략에 연계된 재고 자산 규모, 설비 투자 규모에 따라 잉여 현금 흐름의 변동성이 다소 높게 나타나는 점은 신용도에 부담 요인”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한국경제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