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선거 앞두고 내린 결단…“패 다 깠다” 유가 재상승에 베팅하는 월가
[글로벌 현장] 우크라이나에서 올해 2월 24일 전쟁이 발발한 뒤 공급 부족 때문에 치솟기만 하던 국제 유가가 하루 만에 7%나 급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3월 31일의 일이다.원인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전략 비축유(SPR) 방출 발표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앞으로 6개월간 하루 100만 배럴씩 전략 비축유를 꺼내 쓰겠다고 밝혔다. 총 1억8000만 배럴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하지만 전략 비축유 방출은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다. 일시적이나마 강력하게 공급을 확대할 수 있지만 ‘최후의 보루까지 꺼내 쓴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가 상승에 40년 내 최고치 기록한 물가
그동안 유가가 급등세를 탄 것은 세계 2위 수출국인 러시아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겨냥해 서방과 동맹국들이 잇따라 금수 조치를 내놓자 국제 유가는 한때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았다.
설상가상 글로벌 원유 가격을 쥐락펴락하는 중동 국가들은 추가 증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 플러스(+)’에 러시아가 포함돼 있는 게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산유국으로선 굳이 유가를 일부러 떨어뜨릴 이유도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일부를 제외하곤 원유를 더 생산하는 것도 쉽지 않다.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후 생산 인력이 더욱 부족해진 때문이다.
작년 8월부터 하루 40만 배럴씩 증산해 왔던 OPEC+는 최근 월례 회의를 열고 5월에도 하루 43만 배럴씩 ‘찔끔’ 늘리기로 합의했다.
다급한 것은 미국이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물가가 뛰고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후 천문학적인 부양책을 쏟아낸 미국의 소비자 물가는 지난 2월 7.9%(전년 동기 대비) 올라 4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임금 상승률(5~6%)이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물가를 감안한 실질 임금은 되레 마이너스다.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에겐 빨간불이 들어온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선으로, 취임 후 최저치다. 이대로라면 중간 선거는 해보나 마나다.
바이든 대통령이 고심 끝에 꺼내든 카드가 전략 비축유 방출이다. 작년 1월 임기를 시작한 후 벌써 셋째다. 작년 11월 5000만 배럴, 올해 2월 3000만 배럴, 이번에 1억8000만 배럴(6개월간)을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석유 값이 심각한 생계비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석유는 자동차 등 운송 수단의 필수 연료일 뿐만 아니라 화학 등 다양한 산업의 필수 소재다. 고유가가 모든 산업에 비용 상승의 압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전 세계에서 하루 소비되는 석유는 9700만 배럴 정도다. 그중 미국이 홀로 하루 2000만 배럴이 넘는 석유를 사용하고 있다.
지하의 소금 동굴에 6억 배럴 보관…‘큰일’ 생기면 꺼내 써
미국의 전략 비축유는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만이 방출을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물가 안정 도구다.
사실 전략 비축유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운용하는 제도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을 제외하고도 30여 개 동맹국이 3000만~5000만 배럴의 비축유를 동시에 쏟아 내기로 했다”며 “석유 기업들이 증산을 준비하는 약 6개월간 유가를 안정시킬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미국의 석유 저장고는 크게 중남부 텍사스·루이지애나 주에 있는 연방 정부 저장 시설과 오클라호마 주 쿠싱에 있는 민간 저장 시설로 나뉜다. 특히 전략 비축유는 텍사스·루이지애나 연안의 4개 도시에 몰려 있다.
전략 비축유는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한 1차 오일쇼크 때 긴급 사용분을 따로 저장할 필요성이 커지자 1975년 전격 도입됐다. 지금까지 47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미 에너지부가 관리하는 비축유는 별도의 저장고 대신 수십 개의 인공 소금 동굴에 담겨 있다. 지하 1km 깊이다. 경비가 삼엄하다.
소금 동굴에 보관하는 것은 소금의 화학적 성분이 석유 누출을 막아 주는 원리 때문이다. 지상 저장 탱크보다 안전하고 비용도 줄일 수 있다는 평가다.
이곳에서 비축유를 꺼낼 때는 동굴에 물을 붓는 방식을 활용한다. 물보다 가벼운 원유가 표면으로 떠오르면 포집한 뒤 송유관을 통해 바로 옆 정유 시설로 보내는 식이다. 전국으로 하루 최대 440만 배럴을 운송할 수 있다.
연방 정부가 허용하는 최대 저장 용량은 7억1400만 배럴이다. 2009년 12월 일시적으로 7억2700만 배럴로 최대치를 찍었다. 지금은 최대치 대비 많이 모자라는 편이다. 현재 저장량은 5억8600만 배럴에 그치고 있다. 작년 중반엔 6억5000만 배럴이었다. 이 정도 양으로는 극단적인 생산 중단 상황에서 미국이 약 28일간 버틸 수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 하루 평균 2054만 배럴씩 소비되기 때문이다.
반면 하루 260만 배럴을 쓰는 한국엔 최장 218일간 사용할 수 있는 비축유가 저장돼 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축유를 저장하는 것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공급 충격이 닥치더라도 자체 생산만으로 상당 기간 버틸 수 있다. 한때 전략 비축유를 10억 배럴 이상으로 늘리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무위로 끝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국은 전쟁 등 지정학적 사태,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 운하 봉쇄와 같은 선박 운항 차질, 재정 적자의 완화 필요성이 대두됐을 때 비축유를 방출해 왔다.
조지 W. H. 부시 전 대통령은 1991년 걸프전쟁 때 1730만 배럴의 비축유를 사용했다.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멕시코만 정유 시설이 큰 피해를 보자 2080만 배럴 방출을 지시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2011년 주요 산유국인 리비아 내전이 발발한 뒤 2064만 배럴을 시장에 쏟아냈다.
미 에너지부에 따르면 대통령이 전략 비축유 방출을 결심하면 단 13일 만에 시장에 대량으로 풀릴 수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전략 비축유 방출을 놓고 월가에선 다양한 해석과 전망을 내놓고 있다. 라이스태드에너지의 클라우디오 갈림버티 선임 분석가는 일단 ‘시장 안정’ 쪽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시장의 방향 설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축유의 방출 규모”라며 “총 1억8000만 배럴은 상당한 규모여서 공급 확대 효과가 작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 100만 배럴의 원유 추가 공급은 러시아산 원유의 수출 공백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는 수준이란 것이다. 댈러스연방은행에 따르면 러시아산 원유는 전쟁 이후 하루 300만 배럴 줄어들 것으로 관측됐다. 전략 비축유 방출이 러시아 수출 감소 폭의 3분의 1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만성적인 공급 부족 사태를 겪어 왔다는 점에서 유가가 결국 재상승할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다. 이번 전략 비축유 방출이 “미국이 코너에 몰렸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란 지적이다. 줄어든 전략 비축유를 보충하기 위해 결국 새 원유를 구입해야 하고 이 자체만으로 유가를 다시 자극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회원국을 대상으로 원유 순수입량 대비 90일치 정도를 비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서방 국가들의 동시다발적인 비축유 방출로 저장 잔량이 크게 감소하면서 공급 부족 우려를 부추길 수도 있다.
피커링에너지 파트너스의 댄 피커링 창업자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전략 비축유 방출은 유가 안정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며 “석유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데 반해 공급이 감소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RBC캐피털마켓의 마이클 트랜 애널리스트는 “이번 대량 전략 비축유 방출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이 악화하거나 물가가 더 오른다면 미국 정부엔 선택지가 별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미국)=조재길 한국경제 특파원 road@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