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분식회계 발견돼 투자자 피해
증권사 실사 때 ‘상당한 주의’ 했음 스스로 입증해야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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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유 회사 고섬이 분식회계로 2013년 상장 폐지된 사건에 대해 상장 주간사 회사를 맡았던 증권사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최종 판결이 나왔다. 상장 주간사 회사임에도 고섬의 재무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게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증권업계에선 상장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실사했더라도 기업의 분식회계를 알아채지 못하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과징금 20억원 최종 판결

서울고등법원 행정3부(함성훈‧권순열‧표현덕 부장판사)는 미래에셋증권(당시 대우증권)이 “과징금 부과를 취소해 달라”며 금융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의 파기환송심을 2022년 4월 초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미래에셋증권은 과징금 20억원을 내야 한다.

이 사건은 고섬이 2011년 상장한 지 두 달 만에 분식회계로 거래가 정지된 데서 비롯됐다. 고섬은 상장 계획을 담은 증권신고서에 기초 자산의 31.6%가 현금과 현금성 자산이라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극심한 현금 부족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섬은 이로 인해 2013년 10월 상장 폐지됐다. 상장 폐지 전 정리 매매를 위해 거래가 재개됐던 2013년 9월 24일 하루 동안에만 주가가 74.3% 폭락하면서 주식 투자자들에게 대규모 손실을 입혔다. 반면 허위 재무제표로 투자자를 속인 고섬은 증시 상장으로만 2100억원(공모가 7000원 기준)을 손에 쥐었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하던 금융위원회는 “고섬의 재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상장을 진행했다”며 상장 주간사 회사인 미래에셋증권과 한화투자증권에 과징금 20억원을 부과했다. 이들 증권사가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해 긴 소송전이 시작됐다.

증권사들은 “회계법인조차 감사 보고서에 적정 의견을 줬을 정도로 주간사 회사가 분식회계를 알아채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1·2심 법정에선 증권사들이 웃었다. 당시 재판부는 “주간사 회사·인수 계약상 증권사의 지위와 역할, 증권 공모 참여 시점 등에 비춰볼 때 상장 주간사 회사에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때만 해도 증권사들은 책임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서울 중구 미래에셋증권 본사 전경. 사진=미래에셋증권 제공
서울 중구 미래에셋증권 본사 전경. 사진=미래에셋증권 제공
책임 묻는 판례에 부담 커진 증권사

분위기는 대법원에 가서 급변했다. 대법원은 2020년 2월 한화투자증권이 금융위를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이를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3개월 후인 그해 5월 미래에셋증권에도 똑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재판부는 “원고가 상장 주간사 회사로서 합리적으로 기대되는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주의를 다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상당한 주의를 다했더라도 허위 기재를 알 수 없었다는 사정이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한 번 뒤집힌 판결은 파기환송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서울고법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미래에셋증권에 대해 “원고가 현금과 현금성 자산에 관해 확인하지 않은 것은 주간사 회사로서 주의 의무를 현저히 결여한 경우”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선 이번 판결로 한화투자증권도 과징금을 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이 증권사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 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다.

이 사건이 패소로 종결되더라도 증권사들의 금전적 손해는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에셋증권은 고섬의 예금 잔액 관련 서류를 허위로 발급해 준 중국은행과 중국 교통은행을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걸어 2021년 7월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를 통해 배상액과 지연 손해금을 합쳐 총 532억원을 지급 받았다. 금융위의 과징금을 훌쩍 웃도는 금액이다.

다만 기업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시기에 이 기업의 자금 조달 과정에 관여한 증권사가 책임을 진다는 판례가 생긴 것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고섬의 분식회계 사건 이후 금융위는 자본 시장과 금융 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상장 회사가 증권신고서를 부실하게 기재했을 때 주간사 증권사뿐만 아니라 인수 업무를 맡은 증권사까지 투자자에 대한 손해 배상 책임을 지도록 했다. 상장 예정 기업에 대한 실사에 관여하지 않고 단순히 주식 인수 업무만 맡은 증권사도 책임을 질 법적 근거가 생긴 상황이다.

증권사들로선 특정 기업의 자금 조달 과정에서 부여받은 의무를 다했음에도 부실을 발견할 수 없었음을 입증하는 게 중요해졌다는 평가다.

과거 분식회계를 저지른 대우조선해양의 회사채 발행 주간사 증권사들도 오랫동안 ‘부실 기업의 자금 조달을 도와 기관투자가들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을 받다가 이 같은 입증을 통해 결백을 인정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민사부는 올해 1월 국민연금이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발행 주간사 회사와 인수 업무를 맡았던 증권사 네 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돋보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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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회사채 맡은 증권사들은 ‘결백’ 인정받아

증권사가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의 자금 조달 과정에 참여했다고 해서 반드시 법적인 책임을 지라는 판결을 받는 것은 아니다. 대우조선해양이 분식회계를 저질렀던 시기에 이 회사의 채권 발행 주간사 회사를 맡았던 증권사들은 법정에서 “불법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인정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민사부(부장판사 강민성)는 올해 1월 국민연금이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발행 주간사 회사와 인수 업무를 맡았던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DB금융투자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국민연금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대우조선해양 회사채 3600억원어치를 발행 시장과 유통 시장에서 매입했다. 그 후 대우조선해양이 2012~2014년 실적 등을 부풀린 것이 드러나면서 손실을 보게 됐다.

국민연금은 보유 중인 회사채 중 20억원어치를 15억원에 팔았고 나머지 3580억원어치의 채권 중 약 1790억원을 출자 전환을 거쳐 주식으로 보유하게 됐다. 국민연금은 이 주식을 매도했지만 회수한 금액은 991억원에 그쳤다.

국민연금 측은 “증권사들이 실사를 진행하고도 증권신고서에 ‘회사채 원리금 상환은 무난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적었다”며 “증권신고서상 거짓 기재 등이 없었다면 대우조선해양의 회사채를 사지 않거나 더 싸게 취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권사들은 “주간사 회사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맞섰다. 이들은 해당 소송이 제기된 2017년 4월부터 약 5년간 결백을 뒷받침할 증거를 수집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회사채 발행 당시 모범 규준에 맞춰 실사했던 내역과 관련 자료 등을 그러모았다.

이 같은 전략을 통해 법정에서 주간사 회사로서 역할을 다했음에도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를 알아채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증권사들은 상당한 주의를 했음에도 분식회계로 대우조선해양의 재무제표 중 중요 사항이 거짓으로 기재된 사실을 알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이들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