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5만7234원 너무 낮고 6만6602원 맞다’ 판단
합병 위한 의도적 실적 부진은 증명 안 돼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사옥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사옥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두 회사는 2015년 5월 합병을 발표했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의 주식 전량을 매입하는 방식을 통해 합병을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주식이 지나치게 저평가됐고 제일모직에만 유리하다는 평가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일각에서는 제일모직의 대주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삼성 전체 계열사의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합병이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결국 해당 사건으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의 재판과 동시에 합병과 관련된 여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중 하나가 합병을 거부했던 주주들이 제기한 소송이다. 이들은 제일모직이 자신들의 주식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낮은 금액에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민사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2022년 4월 14일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삼성 측에 주식에 대한 추가 금액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2016년 6월 이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된 지 약 6년 만이다.
2015년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제일모직과의 합병 계약 안건을 주주 결의에 부치는 삼성물산 임시 주주 총회에서 한 주주가 표결 용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5년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제일모직과의 합병 계약 안건을 주주 결의에 부치는 삼성물산 임시 주주 총회에서 한 주주가 표결 용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심 “가격 아무 문제 없어”…2심에서 뒤집혀

삼성물산은 2015년 7월 이사회를 거쳐 주주 총회에서 제일모직과 합병을 결의했다. 합병에 반대한 일성신약과 소액 주주들은 삼성물산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매수하라고 요구하며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다.

주식매수청구권은 인수·합병(M&A) 시 반대하는 주주가 자기 소유 주식을 공정한 가격에 매수할 것을 회사에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자본시장법은 이와 관련해 상장사가 합병할 때 이사회 전날을 기준으로 주식 매수 가격을 산정하도록 하고 있다.

당시 삼성물산이 일성신약과 여러 소액 주주에게 제시한 가격은 주당 5만7234원이다. 주주들은 주식 매수 가격이 너무 낮다며 법원에 가격 조정 신청을 했다.

1심은 삼성물산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단순히 시장의 주가가 순자산 가치나 수익 가치에 기초해 산정된 가격과 다소 차이가 난다는 사정만으로 쉽게 단정해선 안 된다”며 “자본시장법 및 그 시행령에서 정한 대로 합병 관련 이사회 결의일 전날의 시장의 주가를 기초로 주식 매수 가격을 산정하면 5만7234원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심은 1심이 인정한 주당 5만7234원보다 9368원 높은 6만6602원이 적정하다고 결정했다. 2심은 합병을 결의할 무렵 삼성물산의 주가가 회사의 객관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두 회사의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등과 맞물려 주가 변동 가능성이 있었다”며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제일모직 상장 전날인 2014년 12월 17일을 기준일로 한 시장의 주가를 기초로 매수가를 새로 정했다.

대법 “주식 저평가 인정, 경영권 승계 근거 아냐”

대법원도 이 같은 원심 결정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합병 사실이 공시되지 않았지만 그전에 이미 자본 시장의 주요 참여자들이 합병을 예상함에 따라 자본시장법 및 그 시행령에서 정한 날(합병 관련 이사회 결의일 전일) 무렵의 시장 주가는 합병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주식 매수 가격을 산정할 때는 합병 사실의 영향을 받는 시점을 보다 엄격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적어도 제일모직의 신규 상장으로 합병이 어느 정도 구체화한 이후 구 삼성물산의 시장 주가는 합병의 영향으로 공정한 가격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신청인들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점으로서 합병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때는 합병 가능성이 구체화한 제일모직 신규 상장 무렵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원심이 구 삼성물산이 고 이건희 전 회장 측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실적을 부진하게 했다거나 국민연금공단이 구 삼성물산의 주가를 낮출 의도로 구 삼성물산 주식을 지속으로 매도했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므로 이를 판단의 근거로 삼은 점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소액 주주들을 대리한 우지훈 법무법인 엘케이비앤파트너스 변호사는 “과거 석연하지 않은 계열사 간 합병으로 소액 주주가 손해를 보는 일이 상당했지만 우리 법원은 시장 주가의 적정성에 관한 판단을 소극적으로 해왔다”며 “이번 사건을 통해 형식적으로 자본시장법 시행령에 따랐다고 하더라도 지배 주주의 이익을 위해 남용되는 합병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향후 소액 주주의 정당한 재산권이 충분히 보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돋보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합병 관련 대법원 판결, 사모펀드-韓 정부 간 소송에도 영향

이날 대법원에서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유죄가 확정됐다. 둘은 각각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국 정부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메이슨캐피털(메이슨) 간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엘리엇과 메이슨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각각 7억7000만 달러(약 9400억원)와 2억 달러(약 2400억원)의 손해를 봤다며 2018년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메이슨이 한국으로부터 손해 배상금을 받기 위해선 ‘청와대와 국민연금’ 그리고 ‘청와대와 삼성’ 사이의 두 가지 청탁 고리를 입증해야 한다. 2019년 8월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이에 삼성 경영권 승계를 두고 부정 청탁이 있었다고 판결했다. 청와대와 삼성의 연결 고리를 확정한 셈이다.

남은 것은 ‘청와대와 국민연금’ 사이의 관계였다. 이에 한국 법무부는 현재 ISDS에서 “국민연금이 당시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정부의 지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대법원에서 이와 반대되는 판결이 이번에 나온 것이다.

한 국제 중재 전문 변호사는 “대법원의 판결은 합병 당시 국민연금에 부당한 압력이 있었다는 것”이라며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재판이 ISDS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은 이전부터 제기됐다. 엘리엇은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의 재판을 ISDS에 활용하기 위해 2020년 1월 정부에 해당 재판에 대한 수사 기록과 1·2심 공판 자료의 제출을 요구했다.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도 대법원에 “엘리엇이 제기한 ISDS를 판결 과정에서 고려해 달라”는 상고이유보충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대법원 판결이 오래 걸린 이유를 두고 일각에서 “엘리엇과 한국 정부 간 ISDS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정부로서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개인의 국내법상 형사 책임을 물은 것이고 ISDS는 국가의 국제법상 책임 문제”라며 “법리가 전혀 달라 엘리엇·메이슨 ISDS에 불리한 영향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