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근무제 해도 OECD 노동 시간 최상위권인데…尹 유연화에 쏠리는 눈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소재 한 기업의 직원들이 퇴근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소재 한 기업의 직원들이 퇴근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노동 시간 논쟁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대표 공약인 ‘노동 시간 유연화’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주52시간 근무제의 탄력적 운용을 강조하고 있다. 주52시간 근무제를 큰 틀에서 유지하면서도 노사 합의에 따라 직무나 업종 특성에 맞게 노동 시간을 유연하게 운용하자는 것이다.

윤 당선인의 공약집에는 △선택적 노동 시간제 정산 기간 최대 1년으로 확대 △연간 단위 노동 시간 저축 계좌제 도입 △연장 노동 시간 특례 업종에 신규 스타트업 포함 △전문직·고액 연봉자 노동 시간 규제 적용 제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윤 당선인은 대선 기간 중 스타트업 청년들이 주52시간 근무제에 예외가 필요하다고 토로했다면서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1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은 친기업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6개 경제단체장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운동복도 신발도 좋은 것을 신겨 보내야 하는데 모래주머니 달고 메달 따오라고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면서 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윤 당선인의 노동 정책 기조는 경영계의 요구와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경영계는 반도체·바이오 등 기술 경쟁이 치열한 전략 산업에서는 연구·개발(R&D)에 속도전이 필요한 만큼 미국·중국·대만 등과 경쟁할 수 있게 주52시간 근무제를 보완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의 인사·노무 실무자를 대상으로 새 정부가 우선적으로 다뤄야 할 노동 현안에 대해 설문 조사했다. 노동 시간 유연화를 꼽은 응답자가 27.9%로 가장 많았다. 응답자의 55.8%는 노동 시간 유연화를 위해 탄력적·선택적 노동 시간제 정산 기간을 1년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산업 구조의 변화로 서비스업 종사자가 늘고 재택근무자도 늘었는데 지금 노동 시간 제도는 과거 제조업, 공장 중심에 맞춰져 있다”며 “주52시간 근무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전환 시대에 맞춰 국민 공감대에 기반해 제도 운영 방식을 탄력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저녁 있는 삶’ vs ‘돈 없는 저녁’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과정에서 주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지 4년이 됐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주52시간 근무제가 모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선사한 것은 아니다. 임시·일용직 중에선 주52시간 근무제가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고용과 노동 시간이 오히려 큰 폭으로 감소해 일각에선 ‘저녁은 있지만 저녁밥 사 먹을 돈은 없는 삶’이 시작됐다는 하소연도 있었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에 비해 대응력이 낮은 중소 사업체로까지 주52시간 근무제가 전면 확대되면서 일자리와 노동 소득에 불평등이 심화됐다고 토로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중소 조선 업체 노동자 171명을 대상으로 주52시간 근무제 노동자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76.0%가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반대한다고 밝혔고 그 이유로 ‘잔업 감소에 따른 임금이 줄어 생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96.0%)’는 점을 들었다. 주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임금이 감소했다는 노동자가 91.8%로, 시행 전보다 월평균 65만8000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발주처 납기일을 맞춰야 하는 하도급 제조업체나 하절기·동절기에는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중소 건설 업체들은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른 어려움을 지속 호소하고 있다. 올해 1월 중소기업 600곳을 대상으로 한 ‘차기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 방향’ 조사에서도 획일적인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이 가장 개선돼야 할 애로 사항으로 조사됐다.

노동 시간은 노동자의 삶의 질과 노동 생산성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셋째로 노동 시간이 긴 나라다.

2020년 한국인의 연간 노동 시간은 평균 1908시간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최상위권이다. OECD 회원국 평균(1687시간)보다 약 9일, 노동 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1332시간)보다는 24일을 더 일하고 있다. 한국의 법정 노동 시간은 하루 8시간씩 주5일 근무하고 이틀을 쉬는 주5일 근무제이지만 실질적으로 주말과 휴일까지 일하는 초과 근무가 일상화됐다.

고용노동부의 고용 형태별 노동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별로는 남성의 노동 시간이 여성보다 길고 연령별로는 30대와 40대 노동자의 노동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만연한 장시간 근무는 과로사, 저출생, 생산성 저하 등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정부는 장시간 노동에 따른 폐해를 줄이기 위해 주당 최대 노동 시간이 5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주52시간 근무제를 2018년 도입했다.

노동계는 주52시간 근무제 무력화 우려

노동계는 윤 당선인의 노동 공약이 사실상 주52시간 근무제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선택적 노동 시간제 확대는 노동기준법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법 개정 없이 시행령·행정규칙 변경으로 유연화가 가능한 특별 연장 노동 인가 확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 연장 노동은 천재지변이나 그에 준하는 재해·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용부의 인가를 받아 법정 노동 시간인 주52시간을 넘겨 연장 노동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이 제도는 애초 재해·재난 등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돼 왔다. 코로나19 사태로 마스크가 부족한 상황에서 마스크 생산 업체들이 특별 연장 노동을 신청해 연장 근무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2020년 1월 주52시간 근무제 보완 대책 중 하나로 특별 연장 노동 제도의 인가 사유를 대폭 확대한 이후 특별 연장 노동 승인 건수는 2019년 900여 건, 2020년 4100여 건, 지난해 6400여 건으로 급증했다.

노동계는 재난 재해, 업무량 폭증 등의 사유에 국한됐던 주52시간 근무제 예외 제도인 특별 연장 노동이 확대되면 과거 문제가 됐던 ‘공짜 야근’이 만연하고 과로 사회가 부활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강연 노무사는 “노동 시간 유연화는 주52시간 근무제를 사실상 붕괴시키는 제도”라며 “전체 노동자 중 특별 연장 노동이 적용되는 사람은 일부지만 제도가 악용된다면 사각지대에 놓인 누군가는 과로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노무사는 “특히 노동조합이 없는 영세 사업장에서 무분별하게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주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배경에 게임업계의 과로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정보기술(IT)·게임업계는 그간 노동조합 불모지에 가까웠지만 2016년 넷마블 네오에서 일하던 20대 직원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과로사한 직후부터 노조 설립이 확산됐다.

당시 고인의 노동 시간은 발병 4주 전 한 주 78시간, 7주 전에는 한 주 89시간인 것으로 드러났다. 게임 개발자들의 과로사를 계기로 게임 출시일 직전 집중적인 초과 근무를 통해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작업을 의미하는 ‘크런치 모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윤 당선인은 이 밖에 최저임금 제도를 손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노동 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