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재임 8년 동안 GDP 제자리걸음…정치적 이유로 멈춘 구조 조정이 ‘잃어버린 30년’ 만들어

[글로벌 현장]
3월 28일 일본 도쿄의 한 외환중개업체 사무실 전광판에 도쿄 증시 대표지수인 닛케이 평균주가와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표출되고 있다. 이날 엔화 가치는 달러당 123엔대까지 떨어지면서 2015년 12월 이후로 약 6년 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3월 28일 일본 도쿄의 한 외환중개업체 사무실 전광판에 도쿄 증시 대표지수인 닛케이 평균주가와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표출되고 있다. 이날 엔화 가치는 달러당 123엔대까지 떨어지면서 2015년 12월 이후로 약 6년 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로 기록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2년 12월 26일 취임했을 때 닛케이225지수는 1만395였다. 2019년 9월 15일 퇴임일 지수는 2만3656이었다. 재임 기간 상승률은 230%로 역대 총리 가운데 3위다.

1~2위 기록은 고도 성장기인 1960년대와 버블 경제기인 1980년대 세워졌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 장기 침체에 신음하던 시기에 지수가 2.3배 올랐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엔화 약세’

아베 총리 재임 기간의 실업률은 4.3%에서 2.2%로 떨어졌다. 대규모 경기 부양책인 ‘아베노믹스’가 20년 장기 침체에 신음하던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아베노믹스는 대규모 금융 완화와 적극적인 재정 정책, 과감한 성장 전략 등 ‘3개의 화살’로 구성된다. 3개의 화살이 맞아떨어져 기업 실적이 개선되면 설비 투자 증가와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고 소득과 분배가 늘어 소비가 증가한다는 구상이다.

기업의 실적을 늘리기 위한 대표적인 수단이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취임 당시 달러당 85.35엔이었던 엔화 값은 2015년 6월 125.21엔까지 떨어졌다. 2014년 34.62%였던 법인세율을 2018년 29.74%로 낮춰 기업의 부담도 덜어 줬다.

하지만 기업은 늘어난 순익을 설비 투자나 임금 인상에 쓰는 대신 유보금으로 돌렸다. 2012년 304조 엔(약 2929조원)이었던 기업의 유보금은 2018년 463조 엔으로 1.5배 늘었다. 설비 투자 증가율은 3%대로 2000년대의 4.2%를 줄곧 밑돌았다. 고용에도 소극적이었다. 인건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비정규직의 고용을 늘렸다.

그 결과 기대했던 임금 인상, 소득과 소비의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다. 2012년 말 마이너스 1.9%였던 실질 임금 상승률은 2019년 말 마이너스 1.1%였다. 2012~2019년 가계 소득은 0.6%, 소비 지출은 0.3% 느는 데 그쳤다.

기업의 수익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인 노동 분배율은 72%에서 66%로 떨어졌다. 8년간의 아베노믹스 기간 동안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492조 엔에서 505조 엔으로 제자리걸음했다.

오구리 다카시 고마자와대 명예교수는 “아베 정권은 국민의 품에서 돈을 빼앗아 기업의 유보금을 쌓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베 퇴임 3년째를 맞은 2022년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금융 완화와 재정 확장 정책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규제 개혁과 성장 분야에 대한 투자에 소홀히 한 결과 경제의 기초 체력(펀더멘털)이 약화됐다는 평가다. 일본의 잠재 성장률은 2005년 1%선이 깨진 이후 20년 가까이 0%대에 머물러 있다.

구조 개혁을 외면하고 땜질식 처방으로 일본 경제의 약체화를 불러 온 것은 아베 정부 만이 아니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장기 침체를 ‘정책 오류와 폐쇄성이 빚어낸 성장 상실의 30년’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지적대로 경제 정책에 대한 일본 정부와 집권 여당 자민당의 패착과 실기는 30년째 반복됐다. 일본 경제가 1956~1973년 연평균 9.1%의 고도 성장을 이어 가자 일본 정부는 1973년을 ‘복지 원년’으로 지정하고 대규모 사회 보장 제도를 신설했다.

하지만 1973년은 고도 성장기가 막을 내린 해이기도 했다. 이때 만든 방대한 사회 보장 제도는 두고두고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의 ‘경제 브레인’이었던 데이비드 앳킨슨은 “부채가 1000조 엔이 넘는 국가가 수도 직하 지진(도쿄 인근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규모 7.0 이상의 대형 지진)과 같은 대규모 재해를 맞으면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재·부품·장비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바꾸는 데도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일본 제조업의 강점은 신뢰성이 높은 제품을 양산하는 기술력이다. 하지만 구조가 단순한 디지털 제품의 시대로 변하면서 일본의 장기인 정밀 가공 기술을 살릴 여지가 줄었다. 적당한 품질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가격 인하에 목을 매면서 노동 생산성이 주요국 하위권을 맴돌게 됐다.

미국 경제가 애플과 같은 빅테크의 출현으로 도약하는 동안 일본의 시가 총액 상위 종목은 여전히 인프라 기업으로 채워져 있다. 기우치 야스히로 일본생산성본부 선임 연구원은 “1990년대는 업무 효율화가 부가 가치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비용 절감이 가격 인하의 재원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피해 적은 日 경제적 충격은 최대

반복된 정책 실패로 일본의 경제가 얼마나 허약해졌는지는 코로나19 사태의 피해가 미국과 유럽에 비해 극히 적었는 데도 경제적 충격은 더 크고 회복 속도는 더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된 2020년 이후 4차례 긴급 경제 대책을 마련했다. 총사업 규모는 372조 엔으로 2021년 일본 GDP의 68%에 달한다. 경제 규모가 4배 이상인 미국(694조 엔)보다 액수는 적지만 GDP 대비 비율로는 주요국 가운데 압도적인 1위다. 미국의 코로나19 경제 대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1%로 일본의 절반에 못 미친다.

그런데도 일본 경제는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에서 가장 더디게 회복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4월 19일 일본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4%로 전망했다. 미국은 3.7%, 유럽연합(EU)과 중국은 각각 2.8%와 4.4%로 모두 일본을 웃돈다.

미국의 GDP가 이미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한 반면 일본은 2019년 3분기의 최대치(557조 엔)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3.4년 치 예산을 코로나19 대책에 쏟아부었는 데도 효과가 미진한 이유를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낮은 노동 생산성에서 찾는다.

2020년 일본 노동자 1인당 노동 생산성은 7만8655달러(약 9791만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28위다. 선진 7개국(G7) 가운데 꼴찌다. 생산성 순위가 20위권 밖으로 처진 지 20년이 넘었다. 2000년까지 세계 1위였던 일본의 제조업 노동 생산성도 18위까지 밀렸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업의 자체적인 노력도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노베이션(혁신)을 통해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는 대신 인력을 줄이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2021년 희망퇴직을 실시한 상장사는 84곳으로 2년 연속 80곳을 넘었다.

세계 주요국 정부와 기업은 ‘포스트 코로나’에 대비해 ‘리스쿨링(재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한정된 인재를 디지털과 같은 성장 분야에 재배치하기 위한 전략이다.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으로 인해 고용을 유지하는 데 집중됐던 기업의 인사 전략이 인재 재배치로 전환된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노동력을 성장 산업에 재배치해 산업 구조가 진전되면 경제 활성화 효과가 세계적으로 700조 엔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재교육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지만 일본은 이마저도 뒤처져 있다. 2017년 기준 일본 정부가 직업 훈련에 지출한 금액은 GDP의 0.01%로 주요국 최저 수준이다. 미국의 3분의 1, 독일의 18분의 1에 불과하다. 코로나19 경제 대책을 통해서도 일본은 노동자를 해고하는 대신 휴직시키는 기업에 현금을 지원하는 데 4조 엔 이상을 쏟아붓는 등 실업을 줄이는 데 집중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