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복수 정답 인정됐지만…“국가 배상 책임 없다”

[법알못 판례 읽기]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2021년 11월 18일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온 수험생이 한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2021년 11월 18일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온 수험생이 한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년에 딱 하루, 전 세계 비행기들이 한국 공항에서 이륙하지도, 착륙하지도 못하는 35분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날이다.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해 수험생들의 영어 듣기평가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 밖에도 해마다 수험생들의 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해 출근 시간을 늦추는 기업들, 오토바이로 지각 위기에 놓인 수험생들을 학교에 수송하는 경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험생들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 공동체가 전부 나서는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대한민국에서 수능이 얼마나 중요한 시험인지를 알려준다.

이 때문에 수능은 때때로 ‘출제 오류’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다. 매년 수능 문제가 공개되고 나면 문제 자체에 오류가 있어 복수 정답이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온다.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달라지고 대입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출제 오류 사고로 피해를 본 수험생은 수능 문제를 출제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최근 대법원은 국가가 손해 배상 책임까지 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판결을 내놓았다.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 사진=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 사진=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1심 뒤집은 2심 “수험생에 정신적 손해 입혀”

판결의 대상이 된 것은 ‘2014학년도의 수능 세계지리 8번 출제 오류’ 관련이다. 당시 평가원은 북미자유무역협정권(NAFTA)과 유럽연합권(EU)의 총생산에 대한 문제를 냈다. 8번 문제 보기에는 ‘EU가 NAFTA보다 총생산액의 규모가 크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평가원은 교과서 서술에 따라 EU의 총생산액이 큰 것이 맞고 이에 해당 보기를 정답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2010년부터 NAFTA의 생산액이 EU를 앞지른 상태였다.

이에 수험생들은 이의 신청을 제기했지만 평가원에서는 “교과서에 따른 내용”이라며 오류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해당 문제는 행정 소송까지 가게 됐고 2심에서 세계지리 8번 문제에 오류가 있다고 인정했다. 결국 2014년 교육부는 해당 문항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모두 정답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교육부와 평가원은 오답 처리된 수험생들의 세계지리 성적을 재산정하고 추가 합격 등이 가능하도록 구제 조치를 했지만 A 씨 등 94명은 “평가원이 주의 의무를 게을리해 문제 출제와 정답 결정에 오류를 일으키고 이를 즉시 인정하지 않아 구제 절차를 지연하는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1인당 1500만~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다.

이에 1심은 “문제 출제와 정답 결정 등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채택된 세계지리 교과서에 특정 연도를 기준으로 하지 않은 채 유럽연합이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이라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며 “이 사건 지문은 시기에 따라 옳은 지문이 될 수도 있고 틀린 지문이 될 수도 있을 뿐이지 어떤 경우에도 틀린 지문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히 “국가 배상은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며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때’라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의 요건이 충족돼야 가능한데 시험 위원, 출제 위원, 평가원 직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의 결과는 달랐다. 2심은 수험생들에게 각 200만~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부적절한 문제 출제 및 채점을 방지해 응시자가 잘못된 성적을 받지 않도록 노력할 평가원이 재량권을 일탈 또는 남용했다”며 “출제 위원과 검토 위원들은 출제 당시 이미 발표된 신뢰성 있는 국제기구의 통계 자료를 이용해 교과서에 기술된 EU와 NAFTA의 총생산액 비교우열에 관한 교과서 내용이 수능 실시에도 유지되는지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법 “객관적 주의 의무 위반 없어”

하지만 3심에서는 다시 배상의 의무가 없다는 결론이 났다. 공무원이 객관적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해 객관적 정당성을 잃었을 때 국가 배상 책임이 성립할 수 있는데 이는 침해 행위가 되는 행정 처분의 양태·목적, 피해자의 관여 정도, 침해된 이익의 종류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평가원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문제를 출제했고 여러 번 검토 후 완성했다”며 “이의 신청이 있었을 때도 한국경제지리학회와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의 자문을 받은 뒤 이의심사위원회에서 문제의 정답에 이상이 없다고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후 행정 소송 항소심 판결 선고 후 교육부와 평가원이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여 상고를 포기하고 곧바로 응시자들의 구제 절차를 진행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은 시험의 공익성, 문제 출제와 정답 결정 및 이의 신청 처리 과정의 적절성, 오류 인정 후 구제 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문제 출제와 정답 결정에 따른 행정 처분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함으로써 국가가 손해의 전보 책임을 부담할 실질적인 이유가 있으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다고 판단해 왔다”면서 “이 사건에서도 이 같은 법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돋보기]
2022학년도 수능도 어김없이 ‘법원행’

가장 최근에 이뤄진 2022학년도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와 동시에 출제 오류와 운영상 문제로 소송을 당하기도 하면서 여러 불명예를 안았다. 가장 대표적인 논란은 바로 수능 생명과학Ⅱ의 20번 문제 오류였다.

생명과학 20번 문항은 주어진 지문을 읽고 두 동물 종 집단 가운데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이 유지되는 집단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선택지 3개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지 평가하는 내용이다.

소송을 낸 수험생들은 지문에 따라 계산하면 집단 개체 수가 ‘음수’가 되는 오류가 있어 풀 수 없는 문제라며 이의 신청을 했다. 하지만 평가원은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아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는 데 문제가 없다며 이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수험생들은 2021년 12월 2일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오류가 있어 정답을 찾을 수 없다며 평가원을 상대로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심리한 당시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부장판사 이주영)는 “생명과학의 원리상 동물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일 수 없으므로 명백한 오류가 있다”며 정답 결정을 취소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정답을 고집한다면 평가원의 오류는 정정되지 않는다는 교훈으로 남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평가원은 해당 판결을 받아들여 전원 정답 처리했다.

한편 대전의 한 고사장에서는 시험 종료종이 3분이나 일찍 울리며 손해 배상 소송이 이어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4단독 김홍도 판사는 수험생 9명에게 국가가 1인당 200만원씩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재판부는 “기기 조작 미숙 및 부주의로 시험 종료령을 예정 시간보다 빨리 울리게 한 방송 담당 교사 A 씨의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수험생들은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이라며 “공무원인 교사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저지른 위법 행위에 대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사고로 인해 수험생들이 바라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됐다고 볼 객관적인 자료는 없다”며 학생들이 청구한 800만원에 못 미치는 200만원의 위자료만 인정했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