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투자 금액 올해 26% 하락…20년 전 ‘닷컴 버블’ 공포 높아지는 실리콘밸리

[비즈니스 포커스]
WSJ "스타트업, 파티는 끝났다"
지난 13년간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글로벌 스타트업들은 돈 귀한 줄 몰랐다. 투자 자금이 넘쳐났다. 최근 들어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뜨겁기만 하던 투자 열기는 차갑게 식어 버리고 테크 스타트업들은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변했고 투자 자금은 빠르게 빠져나가는 중이다. 후하기만 하던 기업 가치 평가 또한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다. 투자 자금을 통해 인력 충원을 계획하던 스타트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직원들의 해고를 고민하고 있다. 월스트리저널은 “스타트업들의 파티는 끝났다”고 평했다.

‘데카콘’ 평가 받던 스타트업도 투자 못 받아

스라시오(Thrasio)는 아마존에 입점한 작은 브랜드들을 인수하는 ‘아마존 어그리게이터(Amazon aggregator)’로 유명한 이커머스 스타트업이다. 창업 4년 차를 맞은 스라시오는 지난해만 해도 ‘기업 가치 100억 달러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데카콘 유망주’였다. 상장까지 계획하고 있었지만 스라시오는 올해 추가 투자 자금 유치에 실패했다. 아마존 입점 브랜드를 인수하는 데 들어간 34억 달러 이상의 부채를 해결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위기에 부딪친 스라시오는 5월 3일 창업자였던 전임 최고경영자(CEO)를 대신할 새로운 CEO를 발표했다. 인력의 20%를 감축하고 아마존 입점 브랜드들을 인수하는 데도 제동을 거는 중이다.

지난 4년여간 스라시오의 성장 과정은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스타트업들을 닮아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0년 이상 이어진 저금리 기조에 더해 지난 2년간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시장에 더 많은 돈이 넘쳐흐르는 계기가 됐다. 수많은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투자자들의 모험은 더욱 과감해졌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 데카콘(기업 가치 10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들이 늘어나면서 ‘미래의 유니콘’ 기업을 붙잡기 위한 벤처캐피털(VC)과 투자자들의 경쟁도 달아올랐다. 스타트업들이 투자를 받기 위해 피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스타트업에 투자를 받으라고 설득하는 ‘역 피칭’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던 시절이었다. 스라시오 역시 이 강세장을 타고 성장한 대표적인 스타트업 중 하나였다.

시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면서 스타트업 시장에서는 빠르게 거액의 투자 자금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VC들은 스타트업에 높은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대신 지출을 줄이고 수익성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넘치는 투자 자금으로 ‘파티’를 즐기던 스타트업들은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며 마케팅 지출을 줄이고 프로젝트를 취소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 감축에 나선 스타트업들도 적지 않다.

투자 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는 VC들의 움직임은 지난 몇 년간의 ‘과도했던 투자 열기’에 대한 조정 과정에 가깝다. 지난 10년간 VC를 포함한 투자자들이 실리콘밸리에 쏟아부은 투자 금액 규모는 1조3000억 달러(약 1640조원)에 달한다. 2021년 스타트업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VC 펀드에 모인 자금의 규모는 1320억 달러(약 167조원)로, 이는 2019년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6배 이상 늘어난 금액이다. 시장 정보 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VC의 투자 금액 규모는 지난해 4분기에만 950억 달러(약 120조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팬데믹 랠리’를 주도했던 메타와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테크 스타트업들의 기업 가치 또한 ‘고평가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최근 소프트뱅크·타이거글로벌과 같은 주요 투자자들 또한 손실이 커지면서 투자 규모를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 사이에서 20여 년 전 ‘닷컴 버블’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가 커지는 분위기다. 피치북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3월까지 VC 투자 규모는 무려 26% 감소했다. 그중에서도 대규모 투자 자금을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들에 특히 중요한 것은 주식과 기업 투자를 동시에 운용하는 크로스오버 펀드다. 실제 지난해 스타트업에 투자한 자금의 70%를 차지하는 것이 이 크로스오버 펀드다. 피치북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3월까지 이 크로스오버 펀드의 스타트업 투자 금액이 6분기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주식 관리 서비스 기업 카르타의 분석에 따르면 성장성이 높은 스타트업들은 지난해 4분기와 비교해 올해 1분기 42% 정도 낮은 기업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