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도수 맥주 이어 무알코올 맥주도 인기…‘게코노믹스’ 시장 공략이 생존 좌우

[글로벌 현장]
아사히 맥주를 비롯한 일본 맥주회사들은 술 안마시는 일본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알콜 함량이 적은 맥주를 출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사히 맥주를 비롯한 일본 맥주회사들은 술 안마시는 일본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알콜 함량이 적은 맥주를 출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자카야와 애주가의 나라’라는 이미지와 달리 일본인의 절반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일본 최대 맥주 회사 아사히맥주가 최근 일본의 20~60세 성인 80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서 ‘일상적으로 술을 마신다’고 대답한 사람은 2000만 명에 불과했다. 특히 20~30대 젊은층의 금주율이 높았다. ‘소버 큐리어스’라는 가치관이 확산되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술 취하지 않은’을 뜻하는 ‘소버(sober)’와 ‘호기심이 강한’을 뜻하는 ‘큐리어스(curious)’를 합친 말이다. 이전 세대가 술 한잔에 시름을 잊었다면 요즘 세대들 사이에서는 ‘취하지 않는 것이 멋있다’는 가치관이 대세라는 것이다.

일본 2030, “취하지 않는 것이 멋있다”

1999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서 주 3회 이상, 한 번에 1홉 이상의 술을 마시는 애주가의 비율이 남성은 52.7%, 여성은 8.1%였다. 2019년 조사에서 여성의 비율은 8.8%로 제자리인 반면 남성은 33.9%로 줄었다. 특히 20대 남성 애주가의 비율은 34%에서 13%로 급감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일본인이 늘어날수록 주류 회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주류 회사들에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매출 부진이 단기적인 위기라면 음주 인구 감소는 생존을 좌우할 위험 요소다.

위기의 주류 회사들이 생존을 위해 마련한 전략은 ‘술을 마시지 않는 일본인의 나머지 절반을 술 마시게 하는 것’이다. 기존 주류 시장의 2배가 넘는 규모의 시장을 새로 개척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일본 주류 회사들이 내놓은 제품은 미(微)알코올 맥주다. 미알코올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1% 미만인 맥주를 말한다. 아사히가 작년 3월 처음 선보였다. 도수가 0.5%여서 ‘맥주스러운’이라는 뜻으로 ‘비어리(Beery)’라는 이름을 붙였다. 350mL 캔 가격은 214엔으로 아사히의 대표 맥주인 슈퍼드라이(228엔)와 비슷한 수준이다.

알코올 도수가 훨씬 낮은 데도 가격이 비슷한 이유는 독자적인 제조법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아사히는 설명한다. 알코올 도수가 0.5%로 떨어질 때까지 물로 희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맥주를 양조한 후 알코올만 제거하는 증류 기술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아사히 관계자는 “독자적인 증류 기술로 맥아의 감칠맛과 깊이를 살렸다”고 말했다. 아사히는 작년 하반기 미알코올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수를 섞은 주류)인 ‘하이볼리’와 미알코올 스파클링 와인인 ‘비스파’를 추가로 내놓았다.

작년 9월에는 일본의 4위 맥주 회사인 삿포로가 미알코올 맥주 시장에 가세했다. 삿포로는 제품명을 ‘생맥주스러운’이라는 뜻의 ‘드래프티(Drafty)’로 지었다. 도수는 0.7%로 아사히 비어리보다 0.2도 더 높였다. 일본 주류업계가 2021년을 ‘미알코올 맥주의 원년’으로 부르는 이유다.

‘술도 아니고 물은 더더욱 아닌 미알코올 주류를 마시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상 밖의 인기를 끌었다. 아사히는 2021년 12월 비어리 등 미알코올 음료의 매출이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27% 증가했다고 밝혔다. 매출 증가율이 10개월 연속 두 자릿수를 이어 갔다. 세계 3위 맥주 회사인 아사히의 주류 매출에서 미알코올·무알코올 음료의 비율은 7%까지 높아졌다. 아사히는 2025년까지 미알코올·무알코올 음료의 매출 비율을 20%로 현재의 3배 가까이 높이겠다고 밝혔다. 산토리 역시 2008년 100만 상자였던 미알코올·무알코올 음료의 매출이 2021년 2500만 상자로 25배 늘었다고 밝혔다.

미알코올 주류의 선전은 숨은 소비자층이 의외로 다양한 덕분이라고 주류 회사들은 설명했다. 회식 자리에서 한 병 더 마시고 싶지만 다음날을 생각해 더 마시기를 주저하는 소비자에게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일본 주류 회사들에 따르면 ‘술을 한 잔도 못 마시지만 칵테일 한잔하면서 바의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다’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 이들도 미알코올 맥주의 주고객층으로 가세했다.

미알코올부터 무알코올까지…다양해지는 맥주 시장

술자리의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체질적으로 알코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알코올 도수가 0%인 무알코올 음료가 인기다. 무알코올 맥주는 기본이고 무알코올 하이볼, 무알코올 와인, 무알코올 사케, 무알코올 샹그릴라(와인에 과일즙을 섞는 스페인의 주류)까지 나왔다.

일본에서 무알코올 맥주가 처음 판매된 것은 42년 전인 1980년이다. 지금까지 무알코올 맥주는 운전·임신 등의 이유로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못할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음료였다. 최근에는 주류 시장의 트렌드 변화로 소비자들이 찾아 마시는 음료가 됐다는 분석이다.

기린맥주는 최근 무알코올 맥주 브랜드인 ‘그린즈프리’의 디자인을 완전히 바꿨다. 기린맥주 관계자는 “맥주의 대용품에서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음료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시장 조사 업체인 후지경제는 2010년 400억 엔이던 무알코올 맥주 시장이 2021년 986억 엔으로 커졌다고 밝혔다. 작년 3월 무알코올 와인을 새로 내놓은 산토리는 2030년까지 무알코올 음료의 판매량을 현재의 2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2020년 출판된 베스트셀러 ‘게코노믹스, 거대시장을 개척하라’는 술 못 마시는 일본인을 타깃으로 하는 음료 시장의 잠재력을 부각시켰다. ‘게코’는 일본어로 ‘술 못 마시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술을 거절할 때 이 단어를 쓴다.

유명 작가이자 투자가인 저자 후지노 히데토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코들의 수요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만 3000억 엔 이상의 거대 시장이 생겨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본 주류 회사들이 최근 미알코올·무알코올 시장에 힘을 쏟는 것도 ‘게코노믹스’ 시장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란 분석이다.

외식업계도 게코노믹스의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도쿄 간다의 ‘로 논 바(Low-Non-Bar)’는 40종류의 무알코올 칵테일을 선보인다. 도쿄의 특급 호텔인 친잔소도쿄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일 테아트로는 지난 4월부터 소믈리에가 요리에 어울리는 무알코올 와인을 추천하는 페어링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본 최대 유통 회사인 이온마트에서 팔리는 미알코올·무알코올 음료는 50여 종까지 늘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긴급 사태가 모두 해제된 4월 이후 일본 주류 회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일본 성인들을 공략하고 있다. 아사히는 6월 말 도쿄 시부야 중심가에 미알코올과 무알코올 음료를 전용으로 판매하는 바를 연다고 밝혔다. 젊은층에게 미알코올·무알코올 음료의 인지도를 높이는 동시에 이 가게에서 인기가 높은 안주 정보를 거래 음식점이나 이자카야에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마쓰야마 가즈오 아사히 전무는 “지금까지는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는 고객만 바라봤지만 이제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던 4000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새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술을 마시지 않던 일본 성인 전체를 주류 시장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산토리그룹도 4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도쿄역에 미알코올과 무알코올 음료 20종을 판매하는 오프라인 점포 ‘논알코올술집’을 한시적으로 열었다.

점점 술을 마시지 않는 일본 사회와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일본인 전체를 애주가로 만들겠다는 주류 회사들의 거대 프로젝트. 주류 회사의 운명은 물론 일본의 사회와 문화가 이 승부의 결과에 따라 크게 바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