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성과 필요성 ‘핵심’…업무량의 강도 감액·재원의 사용 등도 고려해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외벽 모니터에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 광고가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외벽 모니터에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 광고가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임금피크제는 노동자의 정년을 보장하고 대신 특정 시점부터 임금을 낮추는 제도다. 임금피크제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으로 노동자의 정년이 60세 이상으로 늘면서다. 기업의 부담 경감과 고용 안정을 위해 정년 보장과 임금 삭감을 맞교환하자는 취지였다.

이에 많은 기업이 임금피크제 도입에 나섰다. 한국의 임금피크제 도입 사업장은 7만6507곳(2021년 6월 기준)으로 정년제를 운영하는 34만7433곳의 22%에 달한다. 300인 이상 기업체에서는 2016년 46.8%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와중에 대법원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단이 나와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고령자고용법이 금지하는 ‘연령 차별’이라는 취지다. 벌써 임금피크제 원천 무효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노동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등 산업계의 대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임금피크제와 고령자고용법 ‘충돌’

사건은 20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A 씨는 B연구원을 다니는 직원이었다. B연구원은 2009년 1월 노사 합의를 통해 만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했다.

A 씨도 2011년부터 적용 대상이 됐다. 하지만 A 씨는 퇴직 이후 “임금피크제로 인해 수당·상여금·퇴직금·명예퇴직금 산정에 큰 불이익을 받았다”며 1억8339만원 상당의 소송을 제기했다.

A 씨는 “이 사건 임금피크제는 만 55세의 직원들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으로, 고령자고용법에 반해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고령자고용법 4조의 4-1항은 사업주로 하여금 임금, 임금 외의 금품 지급 및 복리 후생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기준으로 노동자 혹은 노동자가 되려는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한다는 것이다.

반면 B연구원은 “노조와 1년간 협의를 통해 합의한 사항”이라며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의 실적 달성률이 떨어져 55세 미만 직원들과 차별할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1·2심은 모두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두 재판부 모두 해당 사건의 임금피크제가 사실상 연령에 의한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최대 성과를 올리더라도 기존에 받던 임금보다 적은 액수의 임금을 지급받도록 하는 방식으로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 감액”이라며 “51~55세 미만 정규직 직원의 실적 달성률이 55세 이상 직원들의 성과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피고의 주장은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2심 재판부도 “임금피크제 적용 전과 후 원고에게 부여된 목표를 보면 그 수준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며 “명예퇴직 제도도 임금피크제의 대상 조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차별은 안 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022년 5월 26일 퇴직자 A 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B연구원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우선 “고령자고용법 4조의 4-1항 규정 내용과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이 조항은 연령 차별을 금지하는 강행 규정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강행 규정은 개인 간 합의로 무시할 수 없는 법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적절한 절차의 노사 합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다면 무효가 된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 대법원은 “합리적인 이유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의 피고인 B연구원은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기존 정년을 늘리지도 않았고 임금피크제 시행에 따라 55세 이상 노동자의 업무 내용이 변경되거나 목표 수준이 낮게 설정돼 업무량이 감소했다는 점을 입증하지도 못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고 실적 달성률을 높이기 위한 목적의 임금피크제 도입은 55세 이상 노동자 임금 삭감의 정당성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합리성’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정년 등을 늘리기 위해 도입됐는지(정당성) △연령에 따라 차등 임금을 지급할 이유가 있는 직업인지(필요성) △실질적 임금 삭감의 폭이나 기간이 정당한지 △임금 삭감에 준하는 업무량·강도의 저감이 있었는지 △감액 재원이 도입 목적에 사용됐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이런 이유 없이 노동자의 임금을 ‘획일적으로’ 삭감하는 것은 차별이고 위법하다는 것이다. 강세영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이번에는 절차 문제와 상관없이 내용에 따라 무효가 될 수 있다는 판결로 그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돋보기]
무효 판단 다음 날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 괜찮다’ 판결

대법원은 이번 사건이 모든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에 일괄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임금피크제의 효력은 위와 같은 판단 기준에 따라 개별 사안, 사업장별로 달리 판단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년을 늘리는 조건으로 도입한 임금피크제도도 이런 부분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결정 하루 만에 재경지법에서 ‘정년을 연장해 적용한 임금피크제는 유효하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남부지법 13민사부(부장판사 홍기찬)는 2022년 5월 27일 한국전력거래소 직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임금피크제 적용에 따른 미지급 임금을 지급하라며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한국전력거래소는 2016년부터 일반직 직원의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전문위원 등 별정직 직원의 정년을 56세에서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정년 연장 기간 임금을 기존 임금의 60% 수준으로 줄이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이에 한국전력 측 직원들은 “임금피크제는 취업 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것”이라며 “이를 시행하기 위해선 대상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이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법원 판결과 마찬가지로 고령자고용법 위반도 내세웠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임금피크제가 시행되더라도 기존 정년 구간까지는 종전 임금을 그대로 지급받고 정년이 연장된 구간의 경우 직전 임금의 60%를 지급받는다”며 “정년이 연장된 구간에 대한 새로운 임금 제도를 신설하게 된 것으로 원고들이 불이익을 입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단에 일각에서는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유효하고 ‘정년 유지형 임금피크제’는 무효로 판단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 관계자는 “정년 연장이 합리적인 이유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일 수는 있지만 정년을 연장했다는 이유로 모든 임금피크제가 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의 경우 무조건 기업이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판례에 비춰 볼 때 위법 가능성이 낮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는 법원에서 유효성을 인정하는 상태”라고 했다.

2013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직원의 정년을 60세로 올리는 대신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이에 일부 직원들이 소송을 냈지만 올해 4월 대법원에서 건보공단의 승소가 확정됐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