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대 의약품과 달리 IT가 핵심…SK도 투자한 ‘칼라헬스’가 대표 기업
“똑딱 거리는 소리에 맞춰 최대한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측정하겠습니다.”친절한 안내 음성이 나온 후 스마트폰에서 메트로놈처럼 ‘똑딱 똑딱’소리가 났다. 키 160cm의 20대 후반 여성으로 설정해서인지 똑딱 소리는 예상보다 빨랐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하는 속도로 똑딱 소리가 났다. 그 속도로 3분 동안 달리다 정지 버튼을 눌렀다. 너무 앉아서만 생활한 탓일까. ‘손안의 의사’가 산소 포화도와 걸음 수, 심장 박동 수를 종합해 내린 운동 처방은 총 12단계 중 ‘5단계’였다.
5월 31일 헬스케어 기업 라이프시맨틱스를 찾아 디지털 치료제(digital therapeutics) ‘레드필 숨튼’을 체험했다. 레드필 숨튼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다. 이름은 ‘치료제’지만 먹거나 주사를 통해 체내에 흡수시키는 치료제가 아니다. 디지털 치료제는 말 그대로 웨어러블 기기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게임·가상현실(VR) 기기 등 정보기술(IT)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통해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 기기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헬스케어 기능이 들어간 웨어러블 기기와 뭐가 다를까.’ 디지털 치료제는 일반 의약품처럼 임상 시험을 거쳐 효과를 입증해야 한다. 이후 미국식품의약국(FDA)나 식약처 등 보건 당국의 심사를 통과해야 정식 사용할 수 있다.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의사의 처방도 필요하다. 디지털 치료제는 1세대 치료제인 저분자 화합물(알약이나 캡슐), 2세대 치료제인 생물 제제(항체·단백질·세포)에 이은 3세대 치료제로 분류된다. 처방 후 보험도 적용된다. 단순 진단뿐만 아니라 ‘질환 치료’가 목적인 것도 일반 웨어러블 기기와는 다른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상용화된 디지털 치료제는 뇌·신경·정신질환·류마티스관절염·당뇨 등 적응증이 다양하다. 라이프시맨틱스가 수많은 질환 중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택한 이유는 세계 10대 사망 원인 중 해당 질환의 사망률이 유일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은 흡연이나 기타 독성 물질 흡입 등으로 정상적인 호흡이 불가능한 질병이다.
한국에서도 만성 폐쇄성 폐질환의 사망률은 13.9%로 7위다.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 호흡 재활 지침서에 따르면 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에게는 운동을 통한 호흡 재활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호흡 재활 치료는 환자 개개인의 능력에 맞게 맞춤 처방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 호흡 재활 시설을 확충하거나 호흡 재활 실행률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호흡 재활 시설은 대학병원 등 3차 병원에 집중돼 있다. 이런 현실에서 호흡이 어려운 환자가 주 2~3회 정도 지속적으로 외래를 방문하고 호흡 재활을 시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 가정에서도 호흡 재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진단부터 처방까지 전문가와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행된다. ‘최대 운동 능력 평가’를 통해 환자 개개인의 최대 운동량을 측정하게 된다. 이후 최대 운동량의 60% 이상의 강도로 20~60분, 주 3~5회 처방이 내려진다.
기자의 데이터에 의해 나온 5단계 처방은 하루 3번 11분씩 1190걸음을 빨리 걸어야 한다. 60대 호흡기 질환이 있는 남성의 데이터를 가정하면 1단계가 처방되고 이때는 하루 10번씩 56걸음을 걸어야 한다.
2017년 라이프시맨틱스가 파일럿 스터디로 서울아산병원과 보라매병원에서 30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진행한 결과 환자들의 주3회 이상 규칙적인 운동 비율이 60%에서 97%로 1.6배 증가했다. 라이프시맨틱스는 향후 근력 운동 시 모션 인식 기능을 탑재하고 반지형 산소 포화 측정기를 연동할 계획이다. 한국 확증 임상 돌입 기업은 5개 디지털 치료제에 대한 임상은 1상·2상·3상으로 구분되는 약물과 달리 탐색 임상과 확증 임상 등 두 단계로 나뉜다. 5월 현재 한국에서 확증 임상을 진행하는 업체는 웰트·에임메드·하이·뉴냅스·라이프시맨틱스 등 5개 기업뿐이다.
라이프시맨틱스는 현재 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 100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하기 위해 임상자를 모으는 중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20여 종의 디지털 치료제가 FDA 문턱을 넘었다. 가장 먼저 FDA 승인을 받은 회사는 미국의 페어테라퓨틱스(Pear Therapeutics)다. 페어테라퓨틱스는 2017년 약물 중독 치료 의료용 모바일 앱인 ‘리셋(reSET)’으로 디지털 치료제 중 처음 FDA 승인을 얻어냈다.
무작위 대조 임상 시험(399명) 결과 외래 상담 치료와 병행 시 치료 효과가 22.7% 향상된다는 임상 결과의 영향이다. 리셋은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 치료 방법의 하나인 ‘인지 행동 치료(CBT)’를 제공하는 앱이다.
자신이 약물을 복용하는 상황과 요인을 기록하게 하고 온라인 상담 서비스를 통해 충동에 대한 대처법을 훈련할 수 있다. 페어테라퓨틱스는 리셋 외에도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Opioid) 중독 치료제 리셋오(reSET-O)와 만성 불면증 치료제 솜리스트(Somryst) 등을 출시했다. 퓨어테라퓨틱스는 이 3가지 디지털 치료제가 확대되면서 2022년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8% 늘었다. 지난해 1분기 37만 달러였던 매출은 올해 1분기 270만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아킬리인터랙티브는 일본 제약 회사 시오노기와 함께 ‘인데버알엑스(EndeavorRX)’라는 아동용 주의력 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했다. 인데버알엑스는 공중에 떠다니는 보드를 탄 캐릭터와 함께 여행하는 게임이다. 행동아동신경학에 기반해 개발됐고 FDA에서 아동 ADHD 환자의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인정받았다.
한국의 대형 제약사와 바이오 기업들도 인수·합병(M&A)과 투자를 통해 디지털 치료제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기존 합성 의약품이나 바이오 의약품 기술보다 IT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SK바이오팜은 지난 5월 미국 디지털 치료제 기업 ‘칼라헬스’에 투자했다.
칼라헬스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디지털 치료제 기업으로, 수전증 등 본태성 떨림을 치료하는 손목시계 형태의 비침습적 기기를 개발해 판매 중이다.
칼라헬스의 디지털 치료제 칼라트리오는 손목을 지나는 중앙 신경과 요골 신경을 전기 신호로 자극해 시상의 복부중간핵(VIM)에 자극을 전달함으로써 수전증을 감소시킨다. 손목시계를 차듯 칼라트리오를 차면 개인별 떨림과 형태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다른 자극 패턴과 밴드 종류를 달리 적용한다.
칼라헬스는 존슨앤드존슨이노베이션·노바티스·알파벳(구글) 벤처캐피털 GV 등에서 투자를 유치하며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SK바이오팜은 이번 투자를 통해 회사가 진행 중인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과의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은 2018년부터 뇌전증 발작 감지·예측 알고리즘 및 기기 연구·개발(R&D)을 진행 중이다. 뇌전증 발작 감지 기기는 올해 한국 임상에 착수할 예정이고 내년 세계 가전 전시회(CES) 발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은 전략적 투자자로서 칼라헬스와 뇌과학 분야에서의 기술 협력 가능성도 모색하고 있다.
한독 역시 작년 3월 스타트업 웰트에 30억원 규모의 지분 투자를 하고 디지털 치료제 공동 개발에 나섰다. 알코올 중독 및 불면증 분야다. 웰트는 2016년 삼성전자에서 스핀오프한 스타트업이다. 한독은 웰트를 통해 디지털 치료제 연구 역량을 강화하고 알코올 중독과 불면증 디지털 치료제를 공동 개발할 계획이다.
삼진제약은 5월 29일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인 휴레이포지티브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삼진제약은 기존 의약품 사업과 연계된 디지털 치료제의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 신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글로벌 기업들 역시 디지털 치료제 회사와 함께 개발하거나 투자하며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도즈·노바티스·아이언우드파마슈티컬스·아스텔라스·오츠카·GSK·베링거인겔하임·사노피·암젠·머크 등 해외 유수의 제약 기업들이 뛰어들면서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 시장 조사 기관 ‘얼라이드마켓리서치’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은 연평균 20.6%씩 성장해 2020년 35억3700만 달러(약 4조3600억원)에서 2030년 235억6900만 달러(약 29조370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글로벌 고혈압 치료제 시장이 20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2030년 디지털 치료제 시장이 지금의 고혈압 치료제 시장보다 커지는 셈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2020년 질병 부담을 줄일 수 있는 10대 혁신 헬스케어 중 하나로 디지털 치료제를 선정하기도 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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