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수출’ 하루 10억 달러…수입 44% 줄었지만 유가 급등에 흑자 규모 더 늘어

[비즈니스 포커스]
 강력한 경제 제재에도 ‘사상 최대 흑자’, 러시아 경제의 역설
“서방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다.”

5월 23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비공개 회담을 가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의 경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자신했다. 그는 “서양의 경제 대공습은 실패한 작전”이라고 비웃었다.

며칠 뒤인 5월 26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최저 임금과 최저 생계비, 연금 등을 모두 10% 인상하도록 정부에 지시했다는 소식이 러시아의 국영 언론 타스통신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이를 잘 뒷받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100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했다. 경제학자들은 러시아 경제가 머지않아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1분기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강력한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제 제재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자주 쓰이는 수단 중 하나다. 에너지를 무기화한 러시아의 ‘돈줄’을 죄기 위한 강력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가 급등을 부추기며 글로벌 경제에 대한 타격이 심화되는 등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 잘 돌아간다” 푸틴의 자신감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5월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가 올해 첫 4개월 동안 958억 달러(약 120조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2021년 첫 4개월(275억 달러)과 비교해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1914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400여 개 국가의 민간 국제 금융회사 연합체인 국제금융연구소(IIF)는 지난 4월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가 올해 연말까지 최대 2400억 달러(약 296조42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지난해(약 1200억 달러)와 비교해도 두 배 규모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5월 13일 러시아의 주요 교역 대상 8개국 통계를 토대로 분석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후 수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 증가한 반면 수입액은 4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의 시각에서 보면 경제 제재와 글로벌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에서 잇단 철수로 인해 수입이 크게 줄어든 반면 수출은 비교적 예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기록적인 무역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전쟁 중에도 러시아가 기존과 다름없는 수출을 유지하는 가장 큰 무기는 천연가스·석유와 같은 에너지원 수출이다. IIF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경상수지 규모는 수출 부문에서 에너지와 그 밖의 원자재가, 수입 부문에서는 가공 상품이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에너지 수출’이 상대적으로 견조하게 받쳐 주는 상황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효과가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이유다. 전쟁으로 인해 치솟은 유가 또한 러시아의 흑자 규모를 늘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올 1분기에만 33% 급등했는데 원유 수출국인 러시아 또한 그 수혜를 본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러시아는 전쟁 중에도 에너지 수출로 하루에 10억 달러(약 1조원)씩 벌어들이는 중이다.
 강력한 경제 제재에도 ‘사상 최대 흑자’, 러시아 경제의 역설
원유, 유럽 덜 샀지만 중국·인도 더 샀다

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에 강력한 제재를 가해 왔다. 5월 8일 미국 등 주요 7개국이 모인 G7 정상들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화상 정상회담을 연 뒤 러시아 석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할 것이라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고립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유럽 지역의 러시아에 대한 높은 에너지 의존도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3월 보고서를 통해 EU는 천연가스의 40%, 원유의 25%를 러시아산에 의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에서 에너지를 구매하는 대가로 러시아에 지불하는 금액만 연간 4000억 유로(약 531조원)다.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대체재를 개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에너지를 완전히 차단하면 이미 유럽 지역을 짓누르고 있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러시아산 원유를 유통하기 위한 편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블룸버그의 지난 4월 보도에 따르면 유럽 최대 석유회사 쉘은 러시아산 원유 49.99%와 다른 나라산 원유 50.1%를 섞은 석유 제품을 유럽 시장에 판매 중이다. 러시아산 혼합 비율을 50% 미만으로 맞추면 형식적으로 러시아산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를 피할 수 있다. 일명 ‘라트비안 블렌드(Latvian Blend)’라고 불리는 수법이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유럽과 러시아 간 에너지 거래는 에너지 제재 발표 이후에도 암암리에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에서 러시아 에너지를 구매한 금액은 380억 달러(약 47조원)에 달한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이 계속되고 있는 것 또한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인이다. 러시아는 최근 서방의 제재로 원유 수출이 가로막히자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러시아산 원유의 ‘염가 판매’를 제안하고 있다. 중국·인도와 같은 국가들은 이 같은 러시아의 ‘원유 할인 판매 제안’에 실속 챙기기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 4월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은 하루 평균 74만 배럴로, 3월(28만4000배럴)과 비교해 2.6배 늘었다. 전년 대비(3만4000배럴) 21.7배 증가한 규모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EU는 5월 30일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을 연말까지 90%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이번 제재에서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한 수입은 제외됐다. 이번 제재에 반발이 강했던 헝가리와 같은 나라들을 위한 조치다. EU 통계 기관인 유로스탯에 따르면 헝가리는 천연가스의 85%, 원유의 60%를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드루즈바 송유관은 EU가 러시아 원유 3분의 1을 공급받는 통로다. 벨라루스를 기점으로 갈라져 북부 라인은 독일·폴란드, 남부 라인은 헝가리·슬로바키아·체코 등으로 이어진다.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은 러시아산 원유의 대체재를 마련하기 위한 시간을 번 셈이지만 여전히 뒷문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헝가리를 비롯해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가 원유보다 더욱 높은 천연가스 제재에 대해서는 논의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또한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높아지는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인해 러시아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타격 또한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블룸버그가 지난 3월 금융 시장 전문가 24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사상 최대 무역 흑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는 약 9.6%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블룸버그 산하 경제연구소인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현재 러시아의 호황은 경기 불황기에 수출보다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며 나타나는 ‘불황형 흑자’”라며 “수입의 급격한 하락은 아마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로 한동안 유지하겠지만 고통스러운 조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외국 소비재와 핵심 부품의 부족은 계속해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고 비용을 증가시키며 공급망에 충격을 가해 생산에도 부담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돋보기> 치솟는 루블화, 달러 패권 위협?
 강력한 경제 제재에도 ‘사상 최대 흑자’, 러시아 경제의 역설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루블화의 가치는 사상 최저인 달러당 143루블(3월 7일)까지 떨어졌다. 지난 3월 최고 수준의 경제 제재로 여겨지는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 등에 따른 결과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루블(ruble)이 ‘돌 무더기(rubble)’가 됐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6월 8일 현재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61달러로, 전쟁 직전 수준보다 올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인 2월 24일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84루블이었다. 블룸버그는 “루블화는 달러 대비 수익성으로 볼 때 올해 최고의 통화”라고 표현했다.

루블화의 가치가 이처럼 상승한 데는 러시아 정부의 엄격한 자본 통제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난 2월 러시아 정부는 유럽으로 수출하는 천연가스 수입 대금의 루블화 지불 조치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9.5%에서 20%로 두 배 넘게 올리고 기업들이 달러와 유로화 보유분의 80%를 루블화로 교환하도록 강제했다. 개인들에게는 일정 기간 유로화나 달러화 환전을 금지하고 외환 계좌 인출을 제한했으며 외국인의 모스크바 주식시장 투자와 보유 주식 매도 또한 금지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고강도의 환율 방어 정책을 펼친 것이다. 루블화의 가치가 어느 정도 안정세로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지난 5월에만 세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하며 11%까지 금리를 낮췄다.

아직 결말을 말하기엔 섣부르지만 러시아가 ‘루블화 환율 방어’에 성공하면서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마저 흔들리고 있다. 1974년 석유 파동 이후 현재까지 석유 대금의 달러 결제는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이른바 ‘페트로 달러’ 체제다. 그런데 40년간 이어져 오던 이 ‘페트로 달러’ 체제가 깨진 것이다. 러시아가 SWIFT망에서 퇴출된 뒤 루블화로 석유와 천연가스 거래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최근에는 원유 수입의 ‘큰손’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또한 위안화를 통한 거래 비율을 높여 가고 있다. 경제 제재 이후 러시아의 상황을 지켜본 중국 또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지난 3월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안화를 통한 대금 결제를 요청, 현재 방안을 협의 중이다. 러시아 루블화와 중국 위안화 간 거래 규모도 급증하고 있다. 러시아의 가스 기업 가즈프롬 산하 정유회사인 가즈프롬네프는 이미 지난해 9월부터 중국과 러시아의 항공기 급유 비용을 달러 대신 위원화와 루블화로 받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두 통화 간 거래 규모가 월간 기준 40억 달러로 전쟁 이전과 비교해 10배 넘게 급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외환 보유액에서 달러 비율이 2001년 9·1 테러 이후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각국에 대한 경제 제재의 수단으로 ‘달러를 무기화’하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탈달러화 현상이 거세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달러는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 이후 기축통화로서 굳건한 지위를 누려 왔다.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 상승이 지난 70년간 이어져 온 ‘달러 패권’ 시대를 약화시키는 트리거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