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언론, '삼성-인텔 컨소시엄' 가능성 제기
ARM, 삼성전자 '2023 시스템반도체1위' 목표를 위해 가장 매력적인 매물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출국하고 있다.[한국경제]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출국하고 있다.[한국경제]
“목숨 걸고 하는 겁니다. 숫자는 모르겠고 앞만 보고 가는 거예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입에서 5월 25일 이런 말이 나왔을 때 삼성에 관심 있는 여러 사람들이 놀랐다. 그동안 이 부회장이 공개적으로 해온 말들은 꽤나 정제돼 있었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2021년 11월 미국 출장 귀국길), "과거의 실적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2020년 신년사)처럼 다듬어진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중소기업인대회에 참석하기 전 취재진에게 꺼낸 "목숨 걸고"라는 말은 뉘앙스가 분명 달랐다. 준비된 멘트라기 보단 그동안 꾹 눌러왔던 본인의 ‘진심’이 담긴 말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재계에서는 ‘큰 건’이 하나 탄생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그의 ‘진심’은 이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월 7일 떠난 장기간의 해외 출장에서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2026년까지 450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뤄지는 첫 출장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역시나 대규모 인수합병(M&A) 가능성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부터 올해초까지 여러 차례 “3년 내 M&A”를 공언한 만큼 이 부회장의 이번 출장이 M&A를 위한 초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업계에서 가장 유력한 인수후보로 꼽는 기업은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이다. 외신은 삼성전자가 인텔과 함께 ARM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에 참여할 가능성에 대해 보도하고 나섰다. 팻 겔싱어 인텔 CEO가 ARM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을 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최근 방한해 이 부회장과 만났기 때문이다.

IT 매체 샘모바일은 "겔싱어 CEO는 퀄컴의 아몬보다 먼저 컨소시엄을 구성해 ARM을 인수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며 "거대 반도체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꾸리는 방안을 검토한다면 삼성전자는 이 논의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의 1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124조원에 달해 ARM 인수전에 뛰어들 실탄은 충분한 상태다. '삼성 시스템 1위' 마지막 퍼즐 위해서는 '빅딜' 필요
이재용 부회장, 유럽서 '100조 매물' ARM 사올까
‘2023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1위’라는 삼성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시장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한방’이 필요한 상황이다. 메모리반도체를 기반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는 압도적인 시설투자를 이어가며 파운드리 분야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미국 파운드리 제2공장은 2024년 완공을 목표로 삽을 떴고 대만 TSMC를 따라잡기 위한 미세공정 기술 경쟁도 한창이다.

하지만 반도체 설계 시장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설계와 생산으로 분업화 돼있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LSI사업부에서 설계를 맡고 생산은 파운드리 사업부가 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1위를 위해서는 파운드리시장 뿐 아니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AP), 이미지센서, 차량용반도체 등 반도체 설계 시장을 잡아야 한다. 최근 갤럭시S22의 GOS 논란이 터지면서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은 도마위에 올랐다. 퀄컴과 삼성전자의 최신 AP를 탑재했음에도 발열을 잡지 못해 성능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두뇌로 불리는 AP 시장에서도 삼성전자는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글로벌 AP 시장 점유율이 4%로 하락한 데 이어, 올 1분기에도 스마트폰 전 가격대에서 점유율이 급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ARM은 삼성전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매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ARM은 컴퓨터의 두뇌인 중앙처리장치(CPU)와 AP의 설계도를 그리는 기업이다. 이 분야에선 ARM을 따라올 기업이 없다. 특히 AP 설계 시장점유율 95%를 차지하고 있다. 퀄컴·삼성전자·애플 등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ARM의 설계를 기반으로 각자의 반도체 칩을 다시 설계하고 만들어 낸다. ARM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의 팹리스인 셈이다. '반독점 규제' 피하려면 컨소시엄 필수
팻 겔싱어 인텔 CEO[연합뉴스]
팻 겔싱어 인텔 CEO[연합뉴스]
앞서 SK하이닉스와 퀄컴 역시 ARM 투자에 관심을 보였다. 올해 초에는 엔비디아가 ARM 인수하려 했지만 각국의 반독점규제에 의해 무산됐다. 엔비디아의 인수가 무산되면서 ARM의 최대주주인 일본 소프트뱅크는 ARM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이다. 그러나 최근 IPO 시장이 얼어 붙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아 펀드를 굴리는 소프트뱅크로서는 최근의 주식 시장 침체에 골머리를 썪는 중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알짜기업 ARM에서 제대로된 성과를 내야 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ARM 인수에 나설 경우 인텔과 다른 유럽 반도체 회사들과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투자에 나설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 IT 매체 CRM은 지난달 갤싱어 CEO와 이 부회장의 만남에서 ARM 투자 관련 얘기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IT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으로 인텔뿐 아니라 유럽 반도체 기업들과의 협력을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며 “조 바이든 미국 방한 당시 이 부회장과의 만남에서도 컨소시엄 구성과 이에 대한 사전 승인 등을 조율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부회장이 유럽 출장에서 가장 먼저 네덜란드를 방문하고 이후 독일을 방문하자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와 인피니온 인수에 대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두 기업 역시 모두 훌륭한 기업들이지만 이 수준의 인수를 통해서 삼성이 지금의 반도체 시장 판도를 뒤집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함께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는 애플의 자체 CPU인 M1이 뛰어난 효율과 속도로 대히트를 치면서 삼성의 경쟁력까지 의심 받는 받는 상황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물론 M1 역시 ARM이 설계한 칩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목숨 걸었다’고 표현한 이후 유럽행을 택한 만큼 그에 맞는 성과를 들고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