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전쟁·공급망 위기·탈세계화 한번에 닥친 ‘복합 위기’의 시대
바뀐 게임의 법칙, 생존 전략 찾는 기업들

[스페셜 리포트]
그래픽=박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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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이란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도 하고 안전과 존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전략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손무, ‘손자병법’)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아마 ‘전략’일 것이다. 전략(strategy)이란 단어는 나폴레옹 전쟁 때 영어로 들어왔다. 전쟁은 영토·이권과 같은 유무형의 가치를 쟁탈하기 위해 펼치는 조직화된 행동으로 시장을 장악하려는 기업 간 경쟁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전략은 군사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제는 기업 경영에서 더 많이 사용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경쟁자를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선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1990년대 이후 형성된 탈냉전과 세계화를 축으로 하는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전쟁과 감염병, 글로벌 공급망 교란, 경제·안보가 한 몸이 된 지경학(Geo-economics)의 시대다. 불확실성은 더 이상 기업 경영의 ‘변수’가 아닌 ‘상수’다.

위기 경영이 상수가 된 시대에는 변수에 대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기업의 전략은 끊임없는 연구와 기업 간의 전쟁에서 생겨났다. 바꿔 말하면 경영사를 뒤흔들 만한 새로운 전략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얘기다.

전략이 없으면 불확실성의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 기업들은 일상적인 변화가 아닌 기업의 생과 사가 결정되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변곡점에 도달해 있다. 세상이 급변하는 만큼 기업들의 전략도 계속 바뀌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붕괴를 목도한 기업들은 기존 공급망 관리 방식인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 : 재고 최소화)’에서 이젠 ‘저스트 인 케이스(just in case : 재고 비축)’에 집중하고 있다. 현금 비축도 공급망 대란 등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경영 전략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금 기업을 위협하는 거대한 해일이 또다시 몰려오고 있다. 100년 만에 감염병과 전쟁이 동시에 전 세계를 강타하며 글로벌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주력 사업이 흔들리면서 비즈니스 모델 전환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과거의 성공 방식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공정’을 앞세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전면 등장은 기업 경영 환경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모든 위기는 비즈니스 모델 혁신의 기회가 된다. 기업은 한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전진할 때 성장할 수 있다. 기업들을 위협하는 위기 요인과 생존 전략들을 살펴봤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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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① 불확실성의 지뢰밭이 된 세계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팬데믹의 충격에서 회복 중이던 세계 경제의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몰아친 스페인 독감 이후 세계 경제는 100년 만에 다시 전염병과 전쟁의 동시 타격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

미·중의 관계 변화로 냉전 종식 이후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지정학’이란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했고 미국과 중국이 특정 분야의 경쟁을 넘어선 안보와 경제를 아우르는 전략 경쟁을 전개하면서 경제가 안보가 쌍방향적 관계를 형성하는 ‘지경학’의 시대가 도래했다.

수출로 먹고살던 시대도 저물어 간다.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2배에 달했던 초세계화 시대가 끝나고 탈세계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탈세계화 기조에선 제조업 수출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무역협회가 한국 수출 기업 1094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5.5%가 공급망 애로를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물류난과 원자재 가격 상승에 의한 수익성 악화를 가장 큰 애로로 지적했다.
부산항 신선대 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부산항 신선대 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안미경중)’에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와 더불어(안미경세)’로의 전환을 본격화했다.

IPEF가 중국 견제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중국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IPEF에 대해 “자유와 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패거리를 지어 소그룹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이 IPEF에 가입하면서 대중 관계는 풀어야할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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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② ‘사업 리셋’ 수준의 공급망 재편 압력

한국의 대중국 수출 의존도는 지난해 기준 25.3%에 달하는 만큼 공급망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반도체 강국인 한국은 역설적이게도 반도체 대중 수입 의존도가 39.5%로 일본(18.3%)과 미국(6.3%)보다 2.2~6.3배 높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중국 현지 공장 반도체 물량 상당수를 전 공정(웨이퍼 가공) 단계까지 생산한 뒤 한국에 수입해 후공정(웨이퍼 절단·포장)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 반도체’로 불리는 배터리 원자재는 더 심각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배터리 부문 수입액은 41억9144만 달러로 그중 33억6258만 달러어치를 중국에서 수입했다. 주력 수출 품목 중 하나인 자동차 생산에서도 중국산 부품 의존도는 34.9%로 점점 커지고 있다.

조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동차산업연합회(KAIA) 주최 포럼에서 “미·중 분쟁이 심화하면서 글로벌 공급망 이슈는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됐다”며 공급망 다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올해 하반기 글로벌 경기 전망도 밝지 않지만 각종 규제, 신성장 동력 발굴, 노사 관계, 신산업 인재 부족,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대응 등 굵직한 현안이 한꺼번에 몰린 한국의 환경도 안갯속이다.

김현수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정책실장은 “올해 하반기에도 고원자재가·고금리·고환율 상황 속에서 미국 긴축, 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외 요인이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상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 팀장은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지속되는 가운데 금리 인상으로 인해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소비와 투자 위축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현대차 충남 아산공장에서 노동자가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제공
현대차 충남 아산공장에서 노동자가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제공
위기③ 흔들리는 성장 엔진

코로나19 사태와 ESG 대두로 기업들의 주력 사업도 흔들리고 있다. 이 둘은 소비자와 기업 행동 방식에 대전환을 가져왔고 천천히 진행되던 주요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 전환을 가속화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게 됐다. 현대차는 기존의 엔진자동차 시대가 끝나자 새로운 변신을 강요받고 있다.

여기에 팬데믹 이후 디지털 전환 및 ESG 경영은 뉴노멀이 됐다. 기존에 해 오던 경영 방식과 주력 사업만으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전통 산업 구조의 종언과 함께 비대면에 기초한 뉴노멀 시대가 열리는 위기와 기회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AI)·로봇·미래 모빌리티 등으로 발 빠르게 비즈니스 모델을 전환하면서 생존력을 높이고 있다. 삼성·SK·현대차·LG·롯데 등 주요 그룹은 사업 전략을 재편하고 새로운 성장 엔진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경쟁 지형도 바뀌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로봇·자율주행·전동화 등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포드·폭스바겐·도요타 등이 완성차 기업이 현대차그룹의 기존 경쟁자였다면 지금은 애플·구글 등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을 상대로 싸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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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 회장은 올해 1월 13일 온라인 대화 행사를 열고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정과 정의를 주제로 신입 사원 817명과 대화를 나눴다. 사진=SK그룹 제공
최태원 SK 회장은 올해 1월 13일 온라인 대화 행사를 열고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정과 정의를 주제로 신입 사원 817명과 대화를 나눴다. 사진=SK그룹 제공
위기④ 기존 질서 균열내는 MZ세대

내부적으로는 기업들에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MZ세대다. 노동 시장의 주류가 된 MZ세대는 인사 관리 방식과 기업 문화에 대대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MZ세대들을 위해 기업들은 조직 문화 혁신과 재택·원격 근무를 활성화하고 있다.

CJ제일제당·GS리테일은 MZ세대 직원들로 이뤄진 프로젝트팀을 만들었고 LG에너지솔루션·현대중공업·KT&G는 전담 조직을 운영하며 최고경영자(CEO)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네이버·카카오는 출근제를 과감하게 버렸다. 네이버는 7월부터 사무실 출근과 원격 근무 중 원하는 업무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고 카카오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메타버스 근무제를 준비하고 있다. 노사 관계에도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MZ세대를 주축으로 사무·연구직 노조 출범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기존 생산직 중심 노조와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기성 노조의 주된 요구 사항이 정년 연장이었다면 MZ세대 사무직 노조는 성과급 인상이 가장 중요한 이슈다. MZ세대 사무직 노조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고 이직이 보편화된 세대인 만큼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퇴사할 가능성이 기성세대보다 높다. 기술 발전과 함께 제조업 내에서 사무·연구직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 핵심 인재를 붙들기 위한 기업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돋보기]
이재용(왼쪽 넷째)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계현(왼쪽 둘째) 삼성전자 반도체 담당 사장이 6월 14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에서 방호복을 입고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 마틴 반 덴 브링크 ASML 최고재무책임자(CTO) 등과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왼쪽 넷째)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계현(왼쪽 둘째) 삼성전자 반도체 담당 사장이 6월 14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에서 방호복을 입고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 마틴 반 덴 브링크 ASML 최고재무책임자(CTO) 등과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현금 확보하고 ‘공급망 쇼크’ 방어 총력전

미래 먹거리를 위한 신성장 동력 발굴,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 환경,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부상에 따른 조직 문화 변화 등 각종 돌발 변수가 비즈니스 판을 뒤흔들고 있다. 생존을 위협하는 여러 리스크가 한꺼번에 닥친 ‘복합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기업들은 컨틴전시 플랜을 가동하고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현금 보유액을 늘리며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신성장 동력 마련에 사활을 걸고 있다.


-컨틴전시 플랜 가동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하고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앞으로 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위기와 차원이 다를 수 있다”면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감안해 검토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등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며 ‘플랜B’ 이상의 대응을 주문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은 미래 먹거리 사업과 공급망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로 떠났다.

-‘탈중국’ 공급망 다변화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생산 거점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탈중국 전략을 취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이재용 부회장이 미국 방문 중 텍사스 주 윌리엄슨 카운티를 제2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 부지로 확정하고 올해 상반기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현대차그룹도 미국 조지아 주에 전기차 생산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계열사 SK온은 미국 조지아 주에 있는 1·2공장에 이어 지난해 미국 완성차 2위 업체인 포드와 합작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현금 비축
기업들은 신사업 육성을 비롯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공급망 교란, 인플레이션 등에 대응하기 위해 현금을 쌓아 두고 있다. 한국 시가 총액 상위 20개 기업(금융사·공기업 제외) 중 18개 기업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 보유액은 2020년보다 증가했다.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은 2020년 29조3825억원에서 2021년 39조314억원으로 32.8% 늘었다. 같은 기간 현대차는 9조8621억원에서 12조7955억원으로 29.7% 증가했다.

-M&A
인수·합병(M&A)은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한 구조적인 산업 변화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꼽힌다. 딜로이트가 미국 기업·사모펀드 투자사 임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M&A 전략의 일환으로 전체의 33%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장기적인 전환을 가속화해 산업의 구조적인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M&A 거래 성사를 위한 가장 큰 도전 과제로 ‘현재 불확실한 시장 여건(15%)’, ‘비즈니스 전략상의 니즈를 M&A 전략에 녹여내는 것(15%)’, ‘자산 평가(14%)’ 등을 꼽았다.

-사명 변경
팬데믹이 비즈니스의 판을 바꾸면서 기업들의 사명 변경 움직임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기아가 지난해 1월 전기차를 넘어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사명에서 ‘자동차’를 뗀 것을 시작으로 SK에코플랜트(SK건설), SK지오센트릭(SK종합화학), 한화임팩트(한화종합화학), 포스코스틸리온(포스코강판), HD현대(현대중공업지주), 두산에너빌리티(두산중공업) 등이 사명을 바꿨다. 경영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려는 목적에 따라 사업 확장이 가능하고 미래 지향적인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산업·사회·기술의 발전으로 기업이 업(業)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이미지로 고착화된 기존 사명으로는 사업 확장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SG 투자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환경·사회·지배구조(ESG)로 경영 패러다임 대전환이 가속화됐다. 기업의 M&A 시장에서도 ESG가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면서 지난해 ESG는 불확실한 시대의 생존 키워드로 떠올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21년 12월 발간한 ‘K기업 ESG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30대 그룹이 밝힌 환경 분야 ESG 투자 계획은 153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SK그룹은 ESG 시대에 발맞춰 주력이던 석유화학 업종을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배터리와 소재 등 친환경 사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그린 포트폴리오로 전환 중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