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한 사람의 삶을 떠올립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10대에 동생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를 집니다. 온갖 험한 일을 하며 동생들을 거둬 먹이지요. 그래도 학습에 대한 열의는 잃지 않고 밤에 공부를 병행합니다.

서울로 올라와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합니다. 자식들을 낳고 이들을 키우기 위해 또 뼈빠지게 일을 합니다. 모두 대학을 보냅니다. 자식들의 학자금을 다 갚을 즈음 사업을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중국 수출 등을 하며 잘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산 제품이 밀려들어와 결국 사업을 접습니다. 중국에 기계 장비를 팔고 고용 사장이 돼 환갑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쉬어야 할 나이지만 중국을 오가며 이후로 수년간 더 일을 합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작은 돈이지만 뭔가 남겨 줘야겠다는 생각에 자식들 이름으로 된 통장을 하나씩 만들어 소액을 넣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물론 그의 말년에서야 통장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인생의 풍파와 맞서다 얻은 병으로 세상과 이별합니다.

그의 삶은 베이비부머 또는 그들의 부모 세대, 넓게는 X세대 부모님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유산 속에 오늘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최고경영자(CEO)를 다뤘습니다. 한국 산업을 이끌고 있는 100명의 CEO입니다. CEO 얘기를 하려다 부모 세대의 삶을 떠올린 것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가정의 CEO였습니다. 모든 책임을 홀로 어깨에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 무거운 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것은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CEO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다른 공통점은 스토리 구조입니다. 비교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이 제시한 영웅의 스토리는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어릴 적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광야로 나가 고초를 겪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포기하지만 영웅들은 달랐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다 위인을 만나 스스로를 한 단계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닥친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고향에 돌아옵니다. 산업화 시대에 아버지들이 그랬습니다.

CEO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에 사원으로 입사합니다. 처음부터 “재는 CEO감이야”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길이 정해진 오너들은 다르겠지만 이들도 고충은 있었습니다. 부모 세대의 가신들과의 투쟁 사례를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다시 샐러리맨 CEO 얘기입니다. 이들은 대리 과장을 거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보입니다. 물론 미친 듯이 일했겠지요. 어느 순간 경쟁자가 생기고 때로는 부장이나 임원 때 자의건 타의건 직장을 옮기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어도 치열하게 경쟁하며 짤리기 직전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위인을 만납니다.

예를 들어 CEO 순위 1위에 오른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윤부근 부회장, 김현석 사장 같은 선배들이 그를 이끌어 줬습니다. 유일한 여성 CEO인 박정림 KB증권 사장에게는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각종 사건에도 끝까지 믿어준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샐러리맨이 오를 수 있는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과 또다른 공통점은 자식들입니다. 아버지들에게는 아들 딸이 자식이고 CEO에게는 직원과 회사가 자식입니다. 아버지들이 자식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유전자의 확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업 생태계에서는 직원들의 성장 없이 기업의 미래는 없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유능한 CEO 대부분이 직원들의 성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입니다.

사우스웨스트항공의 전성기를 이끈 허브 캘러허 전 회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직원 고객 주주 가운데 누가 중요한가란 질문은 경영의 난제라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난제로 여긴 적이 없다. 직원이다. 좋은 대접을 받은 직원은 고객을 잘 대접한다. 좋은 대접을 받은 고객은 단골이 돼 주주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한 서러움을 자식들이 겪지 않도록 헌신하신 그 시대의 아버지들 그리고 온갖 역경을 딛고 CEO의 자리에 올라 직원과 회사의 성장을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CEO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글을 닫습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