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피스 웨딩드레스, 상아색 원단에 흰색 물결 레이스 달린 소매·무릎 위 올라오는 주름 스커트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발렌티노 ②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의 인연은 1964년 9월 미국 뉴욕의 자선 패션쇼에서 시작된 이후 친분을 이어 왔다. 재클린은 남편 존 F 케네디의 애도 기간에 입을 검은색과 흰색 6벌의 옷을 발렌티노에게 주문했다. 발렌티노는 직원과 모델을 보내 재클린이 집에서 주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재클린은 오랫동안 발렌티노의 고객이 됐고 발렌티노는 재클린과의 인연으로 더 유명해졌다.

재클린은 그리스 사업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의 결혼식에서도 발렌티노의 드레스를 입었다. 30대의 재클린이 입은 드레스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원피스 드레스가 아니라 상하가 분리된 투피스를 즐겨 입었다. 상의는 상아색의 새틴 원단에 흰색의 물결 레이스가 달린 풍성한 긴소매에 소매 단추가 5개 달렸다.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주름 스커트에 굽이 낮은 펌프스를 신었다. 베일 대신 같은 소재의 헤어 리본을 달아 경쾌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여 줬다(사진①). 이 웨딩 드레스는 재클린이 입은 이후 똑같은 디자인으로 60벌이 제작됐다는 일화가 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오른쪽)가 1967년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입은 발렌티노 드레스(사진②)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오른쪽)가 1967년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입은 발렌티노 드레스(사진②)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캄보디아 방문 때 입은 원 숄더 드레스 ‘화제’

재클린이 특히 대중의 시선을 끌고 화제를 모은 것은 1967년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입은 드레스다. 재클린이 캄보디아를 방문할 때 입은 드레스는 옥색 바탕에 은색 장식이 들어간 한쪽 어깨가 없는 원 숄더의 발렌티노 드레스였다(사진②).

1962년 런던 선데이 타임스의 어네스틴 카터는 이렇게 썼다. “올해 신동은 발렌티노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굴리에모 마르코니 빌딩에 있는 그의 전시장은 로마 전역에서 가장 호화롭고 외국 바이어들을 위한 첫 컬렉션으로 120모델을 선보였다.”

1963년 뉴욕 타임의 페트리샤 피터슨은 “발렌티노 컬렉션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고였다. 팔라조 피티에서 열린 런웨이쇼는 잘생긴 젊은 디자이너를 패션계의 승자로 만들었다”라고 썼다. 1968년 3월 1일 세계적인 패션 잡지 WWD는 “숙녀들은 발렌티노를 멀리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1960년대는 변화의 시기로 예술계에서는 팝아트·옵아트 등 새로운 형식의 사조가 등장했다. 영국의 디자이너 메리 퀸트는 미니스커트를 발표해 큰 인기를 끌었다. 메리 퀸트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런던의 ‘틴에이저’ 문화를 중심으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발렌티노는 파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우아하고 여성스러우며 장식성을 가진 의상들을 발표했다.

색상은 블랙·화이트·레드를 주로 사용했고 동물무늬, 꽃무늬 등 발렌티노의 고유한 모티브(V)들을 보여 줬다. 발렌티노의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와 다른 디자인들을 선보였지만 성공했고 미국에 진출해 이탈리아의 대표 디자이너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미국에서 1967년 2월 9일 디자이너로서 명망 높은 상인 니먼 마커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0년 로마·피렌체·밀라노 등에 흩어져 있던 이탈리아의 패션이 밀라노 지역에 집약되기 시작하면서 외국 바이어와 패션 관계자들이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기성복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들이 밀라노에 모여들었다.
1968년 발렌티노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왼쪽)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사진①)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1968년 발렌티노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왼쪽)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사진①)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하지만 발렌티노의 눈은 밀라노에 머무르지 않았다. 패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파리를 정조준했다. 그의 첫번째 파리 기성복 컬렉션은 1975년 4월 9일 조지 5세 호텔에서 선보였다. 세계적인 패션 흐름을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톱 디자이너로 발돋움하게 됐다. 또한 이탈리아 디자인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파리 진출을 계기로 로마와 밀라노에 있던 발렌티노 하우스의 기성복 생산도 변화를 맞게 됐다. 20세기 초 설립된 프랑스 의류 회사 망데(Mendes)그룹이 발렌티노 기성복 생산을 맡게 된 것이다. 패션업계는 1970년대 진취적인 변화를 맞는다. 프랑스의 쿠튀르 패션 하우스는 특정 개인 고객층 위주에서 다수를 위한 기성복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디자이너와 기업의 공조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변화를 구체화한 사람이 망데그룹의 운영 이사인 디디에 그룸바크다.

그의 패션 운영 방식은 생산과 디자이너의 예술적 영역의 분리다. 즉, 생산 업체는 의류 제작만 담당하고 브랜드의 예술적 내용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시대 변화에 맞추지 못해 활력을 잃어 버린 쿠튀르의 새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향수·핸드백·벨트·신발 등으로 사업 확대
발렌티노(오른쪽)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발렌티노(오른쪽)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망데그룹은 이미 기성복 생산을 시작한 12개 프랑스 쿠튀르 패션 하우스들과 협업하면서 뛰어난 의류 제조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4년 12월 11일 발렌티노는 망데그룹과 계약하고 기성복 생산을 시작했다. 망데그룹과는 1979년까지 협업을 이어 갔다. 그 후 이탈리아 최대 의류 생산 업체인 피난치아리오 테실레그룹과 협업하게 된다. 이탈리아 의류 산업은 파리의 의류 생산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섬유 산업은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세계 경기가 위축되고 신흥 공업국들이 저가품 시장을 잠식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기술력을 쌓아 온 전통과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 중심의 건전한 기업 구조, 장인 정신, 국가 차원의 적극적 마케팅 등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했다. 생산 공정이 분업화·자동화되면서 첨단 설비와 숙련된 기술이 융합됐다.

이탈리아만의 독자적인 유연 생산 방식 개발로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가 구축되면서 디자인 색채 감각이 한 층 더 빛을 발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제품 생산 목표도 기존의 중저가에서 탈피했다. 첨단 설비와 우수한 품질 관리를 바탕으로 고가품 위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제조 기술은 파리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았다.

발렌티노는 의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르망 몽틸과 1978년 제휴하고 향수·핸드백·여행용 가방·우산·손수건·벨트·신발 등으로 라이선스 사업을 확대했다. 이는 발렌티노의 브랜드 명성을 더욱 세계적으로 알리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런 사업 다각화의 결과 발렌티노 하우스의 영역은 더 확장됐다. 영향력이 더욱 커진 것은 물론이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다이애나 브릴랜드의 초청으로 1982년 9월 20일 열린 발렌티노 컬렉션은 이를 확인시켜 줬다. 800여 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룬 것이다.
1968년에 발표한 발렌티노 드레스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1968년에 발표한 발렌티노 드레스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참고 자료 : ‘발렌티노의 미적특성 계승에 관한 연구(최선영,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