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제한되며 한때 ‘쇠락’ 이미지도…용산정비창 계획 발표로 ‘관심 집중’

[스페셜 리포트]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사진=아모레퍼시픽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사진=아모레퍼시픽
‘땅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고 했던가. 천문학적 자금을 굴리는 기업들에도 ‘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리가 좋아야 기업의 백년대계를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풍수지리 전문가들이 명당으로 꼽는 터에 사옥이 몰리기도 하고 땅터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비책을 쓰기도 한다. 사옥의 방향이나 위치, 조형물까지 대개 최고경영자(CEO)의 고민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최근 용산이 기업의 주요 업무지구로 떠올랐다. 기업의 터로서 용산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지금은 아모레퍼시픽과 하이브가 자리한 ‘핫’한 땅이지만 한때는 ‘용산 잔혹사’라는 악명이 따를 만큼 기업들의 애환이 담긴 땅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용산 땅의 유구한 역사만큼 그 길 위에 켜켜이 쌓인 기업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봤다. 세계의 도시 용산에 모이다“서울 용산은 한반도를 넘어 새롭게 열리는 유라시아 시대의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먼 길을 바라보며 용산 시대를 힘차게 개척합시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2018년 용산 사옥에서 창립 73주년 기념 행사를 열고 “아모레퍼시픽이 가야 할 길은 글로벌”이라며 구심점으로서 용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울의 중심인 용산을 기반 삼아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은 서 회장이 2010년 사옥 설계부터 완공까지 7년을 공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글로벌 중심지로 용산을 주목한 것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용산은 도심(종로)과 영동(강남), 여의도의 3핵을 연결하는 중심축상의 전략 요충지다. 고속전철이나 인천국제공항과도 곧바로 연결된다. 용산 역사는 서울역과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도심 기능과 연계해 서울의 국제 경쟁력 강화의 거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실제 서울시가 2005년 발표한 ‘2020 도시기본계획’에 따르면 고속철도 역사·신공항철도·광역철도를 하나로 묶어 3핵 간의 연계를 강화하고 이 일대를 용산공원과 한강의 자연 요소와 연계된 쾌적한 부도심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 있다.

여기에 다양한 세계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문화적 이점도 기업의 글로벌 이미지를 더하는 요소다. 용산은 한 세기 넘도록 지역의 심장부를 외국군의 주둔지로 내주면서 주변에 많은 대사관과 외국인 주거지가 형성돼 있다. ‘서울 속 지구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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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요충지로서 LG유플러스도 일찌감치 용산에 터를 잡았다. LG유플러스는 2015년 남산(서울 중구)에서 용산으로 사옥 이전하며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도약하는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계적 그룹이 된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 하이브도 용산 시대를 연 대표적인 기업이다. 하이브는 기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용산구 한강대로로 사옥을 확장 이전했다. 이 회사는 용산 사옥에 대해 “최고의 콘텐츠 제작과 글로벌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신사옥으로 이전하게 됐다”며 “(용산은) 탄탄한 물리적·공간적 기반을 통해 본격적인 톱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근거지가 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이 밖에 글로벌발 기업들이 용산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도티·장삐쭈·풍월량 등 인플루언서를 관리하는 멀티 채널 네트워크(MCN) 회사인 샌드박스네트워크가 2020년 서울 강남구에서 용산으로 사옥을 이전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란 브랜드로 성장한 패션 기업 더네이쳐홀딩스 또한 2021년 서울 금천구에서 용산으로 터를 옮겼다. 두 회사 모두 중국과 유럽 등 해외 진출에 큰 뜻을 두고 있다.

동남아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웰컴금융그룹도 올해 하반기 중에 용산 시대를 연다. 6개 계열사 모두 서울 구로구에서 지하철 4·6호선을 둔 삼각지역 근방에 자리한 지상 20층 건물인 구 KT용산사옥으로 터를 옮기기로 했다. 사옥 이전과 함께 이머징 마켓에서 사업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이뿐인가. 세계 도시 용산에 딱 들어 맞는 건물도 있다. 용산의 또 다른 상징으로 부상한 서울드래곤시티호텔이다. 용산 토박이인 승만호 서부T&D 회장의 역작으로, MICE(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LS용산타워. 사진=한국경제 DB
LS용산타워. 사진=한국경제 DB
‘용산 잔혹사’ 역사 뒤안길로지금이야 서울의 주요 업무지구로 인정받는 용산이지만 불과 1990년대만 해도 용산은 기업의 업무지구로서는 큰 이점이 없었다. 삼성·SK·LG·신세계·부영·농심·아모레·GS·대상·LIG·태광·빙그레·쌍용건설·SPC 등 한국 굴지의 기업 총수들이 터를 잡고 살았지만 기업의 터란 인식은 크지 않았다.

서울의 3대 업무지구인 CBD(광화문·종로·중구 일대)·YBD(영등포구·여의도 일대)·GBD(강남·서초구 일대)를 품은 입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좋은 입지 때문에 손해를 봐야만 했다. 광복 이후 미군 주둔 지역으로 활용되면서 개발의 뒷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쇠락한 기업의 이미지가 덫칠해져 있기도 했다. 용산구 동자동에 자리한 서울게이트웨이타워의 원래 이름은 ‘벽산 125빌딩’이다. 벽산그룹이 1991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유명 건축가인 김수근 씨에게 설계를 맡겼다. 하지만 그룹이 1998년 워크아웃을 겪으면서 빌딩 주인이 바뀌는 운명을 맞았다. 인근에 자리한 용산구 갈월동의 갑을빌딩의 주인 또한 한때 섬유 종합 그룹인 갑을그룹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외환 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제그룹은 한때 재계 7위권에 이름을 올렸던 기업이다. ‘프로스펙스’란 브랜드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이 그룹의 위용을 보여준 게 바로 1984년 용산구 한강로2가에 새로 지어진 사옥, 국제센터빌딩이다. 용산역 앞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로 지어진 신사옥은 한때 용산의 랜드마크 역할도 했다. 독특한 기하학적인 구조로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물이 지어진 지 불과 1년 만인 1985년 공중 분해됐다. 당시 주거래 은행 측은 용산 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도산시켰다는 게 정설이다.

국제그룹의 랜드마크였던 사옥은 한일그룹에 흡수됐다. 한일그룹은 모회사인 한일합섬이 1973년 처음으로 1억 달러 수출의 탑을 받는 등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98년 부도로 해체됐다. 사옥 역시 셋째 주인을 맞아야만 했다.

잘나가던 기업들이 훅훅 쓰러지자 용산과 건물을 둘러싸고 흉측한 소문도 돌았다. 특히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기업들이 위기에 처하자 ‘용산 잔혹사’, ‘서향 괴담’이란 악명이 따라붙었다. 서울역 맞은편에 건물을 올리면 기본적으로 서쪽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지는 해’의 방향이어서 사업 성장에 맞지 않다는 풍수지리에 입각한 이야기였다.

국제센터빌딩에 대해선 사옥을 높게 지으면 기업의 운이 쇠락한다는 ‘바벨탑 증후군’을 들어 ‘비운의 빌딩’이란 얘기가 돌았다. 풍수지리학 전문가들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뾰족한 상단부와 곳곳에 돌출된 각이 건물 관상학적으로 길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2002년 이랜드가 국제상사를 인수하며 셋째 주인으로 정해지는 듯했던 국제센터빌딩은 2007년 LS그룹의 E1이 다시 회사를 가져가면서 지금의 LS용산타워가 됐다. E1 역시 기존의 소문을 의식한 듯 국제상사를 인수하자 마자 사명을 LS네트웍스로 바꾸고 빌딩은 3년에 걸쳐 전면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했다. 사옥명도 LS용산타워로 변경했다. 이미 기틀이 잡힌 곳인 만큼 고치는 쪽으로 풍수적 결함을 보완한 것이다.

지금의 LS용산타워에는 과거의 소문은 온데간데없다. 용산 미군 기지의 이전과 용산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용산역 앞 구 랜드마크의 위상을 다시 찾고 있다.
서울시가 7월 26일 발표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조성 조감도. 사진=서울시
서울시가 7월 26일 발표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조성 조감도. 사진=서울시
또 기업이 나간 자리엔 다시 핫한 기업들이 용산을 채우고 있다. 이 기세는 당분간 더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10년째 지지부진하던 용산정비창 일대 계획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7월 26일 용산정비창 일대 약 50만㎡를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업무지구를 중심으로 일자리와 주거 등이 갖춰진 직주 혼합 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또한 용산의 입지 규제 최소 규역을 지정해 초고층 건물도 들어설 수 있게 한다고 덧붙였다.

용산정비창 부지는 서울 한복판에 여의도공원의 2배, 서울광장의 40배에 달하는 규모로 자리한 금싸라기 땅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용산정비창 일대는 글로벌 하이테크 기업이 앞다퉈 입주하고 싶어하는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