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새 우울증 환자 20대 127% ·30대 67.3%↑…전문가 “병원 문턱 낮아진 건 건강한 신호”

[스페셜 리포트]
“우울하고 불안해요”…‘직장인 금쪽이’ 180만 명 시대[직장인 금쪽이①]
“요즘 정신건강의학과 초진 예약이 티케팅 수준이에요.”
증권회사에 다니는 A(30) 씨는 최근 팀장과의 갈등으로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네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A 씨의 마음을 갉아먹는 씨앗이 됐다. 하지만 병원에서 “초진 상담은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A 씨는 수소문 끝에 다른 지역의 예약이 필요 없는 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A 씨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은평구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평일 오후인 데도 대기실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오후 4시부터 당일 진료 환자가 꽉 차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해 우울증·불안 장애 환자 180만 명 심각한 문제지만 나쁘지 않은 신호도 나타나고 있다. 수치로만 보면 한국인들의 정신 건강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최근 5년간 우울증과 불안 장애를 겪는 환자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진료 통계를 토대로 산출된 우울증·불안 장애 환자만 180만 명에 달한다. 우울증 환자 수는 93만3481명으로, 2017년 대비 35.1% 증가했다. 불안 장애 환자 역시 86만5108명으로, 같은 기간 32.3% 늘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만 추린 숫자다.
긍정적 신호는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낄 때 혼자 앓지 않고 병원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증가세를 ‘건강한 변화’라고 분석한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주원 연세숲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조현병처럼 유전적 요인이 발병 원인인 정신 질환이 아니라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 질환 예방과 치료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건강한 신호”라고 말했다.

2020년 한국 국민의 정신 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7.2%였다(보건복지부). 미국 43.1%(2015년), 캐나다 46.5%(2014년), 호주 34.9%(2009년)와 비교하면 현저히 낮다.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서 우울감을 느끼거나 우울 증세를 보이는 인구 비율은 36.8%로 조사국 중 중 가장 높았다. 두 수치의 괴리감은 마음이 아파도 병원을 찾지 않는 한국인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TV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 같은 미디어가 정신의학과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민 4명 중 1명이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알코올·니코틴 중독 같은 정신 질환을 겪는 만큼 ‘정신 질환은 감기와 같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영향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가 닫힌 것 또한 정신 질환 환자가 증가한 이유다.

하주원 원장은 “사회와의 단절은 곧 사회적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준다”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고 나서 커뮤니티 활동이 중단됐고 운동과 여행 등 스트레스를 풀 창구가 모두 닫히면서 최근 2년간 정신 질환 환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우울하고 불안해요”…‘직장인 금쪽이’ 180만 명 시대[직장인 금쪽이①]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들여다보면 최근 정신의학과를 찾는 이들은 주로 20대와 30대인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에는 60대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았다면 2021년에는 20대 환자가 가장 많았다. 2030 우울증 환자의 증가율도 높았다.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20대 환자 수는 2017년 대비 2021년 127.1% 급증했다. 30대 환자는 같은 기간 67.3% 늘었다.

코로나19 이후 '머니무브'에 올라타 벼락부자가 됐거나, 상승열차에 탑승하지 못해 벼락거지가 된 사람들이 정신의학과를 찾는 경우도 늘었다. 하주원 원장은 "돈을 잃은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추락한 것 같은 불안감에 병원을 찾고, 갑자기 큰 돈을 손에 쥐게 된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병원에 온다"고 전했다. 미국 500대 기업 95% 임직원 정신 건강 관리한다 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는 곧 기업과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직원 한 명 한 명의 정신 건강은 기업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심리학회 조사에 따르면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려 번아웃이 온 직원은 그렇지 않은 직원보다 일을 그만두고 이직 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2.6배 높았다. 병가를 쓸 가능성은 63%, 응급실을 방문할 가능성은 23% 높았다. 직원의 직무 스트레스가 곧 기업의 생산성과 직결된다는 뜻이다.

이를 숫자로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적으로 우울증으로 인한 생산성 손실은 연간 1조 달러가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WHO의 다른 통계는 정신 건강에 1달러를 투자하면 건강과 경제적 혜택을 4달러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변호사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인 수전 케인의 책 ‘비터스위트’에 직원 개개인의 정신 건강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인 실제 사례가 나온다. 책에서는 미국 미시간 주 병원의 진료비 수금팀 연구 사례가 등장한다. 이 팀은 모든 직원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서로 어려움을 공유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재정 문제나 이혼, 가정 폭력, 가족 사망 등 개인적 고민을 나누며 서로 마음을 써줬고 아플 때는 서로 돌봤다. 그러자 이전보다 수금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졌고 이직률은 2%대로 떨어졌다. 이 회사 전체의 평균 이직률은 25%였다.

또 다른 사례도 등장한다. 미국 석유회사인 쉘 오일 석유 시추팀은 조직 문화 전문가를 초빙했다. 이후 일하는 과정에서의 두려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사적인 아픔을 공유하는 문화가 퍼지자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고 발생률이 84%나 줄었다. 이 밖에 미국 100대 기업 중 90% 이상, 500대 기업 중 95% 이상이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 지원 프로그램(EAP)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 역시 사내에 상담소를 설치하고 상담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직원들의 정신 건강에 힘을 쏟고 있다. 생산성 향상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나 우울증으로 인해 생긴 질병이나 극단적 선택으로 기업 이미지가 손상되고 관련 소송이 발생하는 등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한국에서 전문 상담센터 14개, 마음 건강 클리닉 10개를 운영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20개 생산법인에서 11개의 전문 상담센터를 운영 중이다. 공인 자격증을 보유한 전문 상담진과 정신과 전문의가 상주하며 임직원들의 스트레스와 고민에 대해 일대일 상담을 진행한다.

SK이노베이션은 2005년부터 직원들의 멘탈 관리를 위해 사내 상담센터 ‘하모니아’를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이 한창이던 지난해 상반기에는 상담 건수가 전년 대비 약 38% 늘었다. 아모레퍼시픽은 창립 77주년 행사에 오은영 박사를 초대했다. 오 박사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사내 게시판에는 직원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1970년대부터 번아웃 증후군을 연구한 크리스티나 매슬랙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명예교수는 한 강연에서 탄광과 카나리아의 예를 들어 개인의 정신 건강과 조직에 대해 설명했다.

“옛날 광부들은 탄광 깊이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데리고 갔다. 카나리아는 산소에 민감하고 인간보다 약하기 때문에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거나 죽으면 인간도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라는 위험 신호가 된다. 탄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카나리아가 숨이 막혀 더 이상 노래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카나리아의 죽음이 허약함이 아니라 탄광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와 기업이 개인의 정신 건강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