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누구도 아닌 ‘내 이야기’하며 ‘치유’ 아닌 ‘위로’를 받다

[스페셜 리포트]
‘직장인 사춘기’ 앓던 A 씨의 심리 상담 경험기 [직장인 금쪽이④]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 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 (볼빨간사춘기, ‘나의 사춘기에게’).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노랫말이 그 어느때보다 아프게 다가올 때가 있다. 죽을 만큼 노력해 취업에 성공했지만 상사의 잔소리에 매일 주눅 들고 밥 먹듯 하는 야근에 몸은 지쳐만 간다. 분명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앞날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기 마련인 ‘직장인 사춘기’다.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지만 남들 다 겪는 일에 유난 떠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을 터놓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정신의학과나 심리상담소를 방문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안과 우울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A 씨 또한 10여 년 전 ‘직장인 사춘기’를 호되게 겪었다. 직장에서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친구에게 얘기하자 한 심리상담소를 추천해 줬다. 처음에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가벼운 우울증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굳이 심리 상담까지 필요할까 싶었다. 하지만 한 번쯤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서구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캐릭터들이 심리 상담을 받는 모습을 꽤 자주 봐 온 덕분에 상담을 받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상담 효과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당시 A 씨는 2년 전 결혼한 이후 시부모님과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깔끔한 시어머니의 성격이 A 씨를 힘들게 했다. A 씨가 설거지나 청소를 하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시어머니의 지적이 뒤따랐다. 집안 어른에게 자꾸만 지적을 받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갈수록 위축됐다. 어느 순간 집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잔뜩 주눅이 들어 동료들의 눈치만 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정말로 내가 문제인 것일까.” A 씨는 단순하게 지금 겪고 있는 이 불안과 우울이 모두 자신의 무능함이나 잘못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아무리 심리 상담사라고 하더라도 낯선 이에게 불안과 우울을 털어놓는 게 편할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편하게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상담사는 가끔씩 질문을 던질 뿐 A 씨의 말을 거의 끊지 않았다. 들어주는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상담사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똑같은 사건이라도 ‘새로운 관점’에 다다르는 경우가 많았다. 관점이 바뀌면 해석이 바뀌고 복잡했던 마음도 한층 누그러졌다.

때로는 상담사의 조언 한마디가 삶의 ‘지침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어머니나 직장 동료들에게 지적 받으면 불쾌한 감정이 올라오는데 제가 그런 불쾌한 감정을 느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결국은 저 잘되라고 하는 얘기인데…”라는 A 씨의 하소연에 상담사는 “A 씨가 불쾌하면 불쾌한 게 맞는 거죠. 왜 자신의 감정조차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으려고 하세요”라고 되물었다. 상담사는 설명을 이어 갔다. A 씨가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적어도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면 그것 또한 A 씨 스스로의 ‘선택’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화’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해 온 A 씨는 매번 불쾌한 감정이 들 때마다 똑같은 행동만 취했다. ‘화를 낸다’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참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선택지를 뺏긴 상태에서 그렇게 참아 넘긴 화는 억울함으로 쌓인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수록 A 씨의 마음의 상처 또한 커져 가는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담사의 조언은 A 씨에게 도움이 됐을까. 실제로 A 씨는 상담 후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말한다. 물론 직장 상사나 시어머니와 갈등 상황이 생길 때면 여전히 버겁다. 그렇다고 시어머니나 직장 상사와 같은 어른에게 자신의 화를 표현한다는 게 여전히 쉽지 않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불쾌한 감정을 느껴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들 때 ‘화를 내는 것도 선택지의 하나라는 것’을 인지한 것 만으로도 마음을 추스르기가 수월해졌다. A 씨는 “비슷한 상황에서 예전에는 그저 불쾌하고 억울하고 우울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 같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화를 참고 넘어가더라도’ 내 감정을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A 씨는 지금까지 종종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비정기적이지만 마음이 복잡하거나 힘들 때면 적게는 1년에 한 번, 많게는 2~3개월에 한 번 정도 상담을 받는다. A 씨는 “상담을 받는다고 복잡한 삶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굳이 값비싼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그 과정 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경험담을 들려줬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