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안보 시대, 국가 대표로 뛰는 재계 총수들
해외 사업장 둘러보고 하반기 경영 전략 구상
대통령 특사 자격 해외 순방 앞둬…부산 엑스포 유치 총력전

[비즈니스 포커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 19일 복권 후 첫 대외 행보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 19일 복권 후 첫 대외 행보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대기업 총수들은 흔히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 대표 선수에 비유된다. 혁신 기술로 글로벌 시장에서 ‘코리아’ 브랜드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한 전쟁, 감염병, 탄소 중립, 디지털 전환 등 전 세계적인 이슈에서도 구원 투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들은 코로나19 사태에서는 마스크·백신의 생산·공급을,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인 탄소 중립 이슈에서는 저탄소 기반으로 사업 구조를 개편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는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민간 외교관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은 2022년 5월 조 바이든 대통령 방한에 맞춰 미국 현지 공장 신설 등 대미 투자 계획을 내놓으며 국가와 국가를 잇는 가교를 만들었다.

재계 총수들의 활약상을 보면 농구팀의 ‘식스맨(후보 선수)’이 떠오른다. 5명의 주전 선수가 한 팀인 농구에서 언제든지 교체로 투입될 수 있는 제6의 멤버를 식스맨이라고 한다. 식스맨은 선발 출전 선수의 체력이 떨어지거나 경기의 흐름을 바꿀 때 기용된다. 통상·외교에서 불리한 판세를 뒤집는 데는 재계 총수들의 물밑 외교가 효과를 발휘했다.

전쟁과 공급망 이슈, 고물가·고금리 등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재계 총수들은 추석에도 쉬지 않고 해외 출장 등을 통해 글로벌 경제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모색하면서 하반기 경영 전략 구상에 몰두할 것으로 예상된다. 추석을 맞이해 주요 그룹 총수들의 근황과 하반기 경영 계획을 살펴봤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회장 승진 임박

이재용(55) 삼성전자 부회장은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후 3주 연속 계열사를 방문하며 현장 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첫 현장 경영 행선지는 1983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기흥캠퍼스였다. 미·중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반도체는 미국 기술 안보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며 초격차 기술 경쟁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부회장은 8월 19일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단지 기공식 참석을 시작으로 주요 계열사 사업장을 방문하며 직원들과의 소통을 늘리고 있다. 이후 방문한 삼성엔지니어링 글로벌엔지니어링센터에서는 사내어린이집을 찾았고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직원과 소통했다. 8월 30일에는 처음으로 삼성SDS 잠실캠퍼스를 찾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 직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 부회장은 사업장 방문 때마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며 직원들과 사진을 촬영하고 대화를 나누며 스킨십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잇단 현장 경영 행보를 두고 이 부회장의 회장 승진을 앞두고 내부 결속 강화에 나섰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부회장은 2012년 44세의 나이로 삼성전자 부회장에 오른 후 10년째 부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2014년 고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사실상 총수 역할을 해왔지만 사법 리스크로 회장직을 달 수 없었다. 4대 그룹 총수 중 이 부회장만이 유일하게 회장이 아닌 부회장 타이틀을 달고 있다.

최근 복권 결정으로 그동안 발목을 잡아 온 취업 제한 족쇄에서 벗어나면서 회장 승진과 함께 ‘뉴 삼성’ 구축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오는 11월 1일 삼성전자 창립 기념일에 맞춰 회장에 취임, 이건희 회장이 1993년 발표한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제2 신경영 선언’과 같은 비전 발표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이 부회장의 경영 복귀 후 첫 메시지에 대한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회장은 9월 9~12일 연휴 기간 영국을 포함해 유럽 출장길에 오를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2017년 미국 전장 기업 하만 인수 이후 멈춰진 대규모 인수·합병(M&A) 성사가 임박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영국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이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2030 부산세계박람회(이하 부산 엑스포) 유치 활동에도 나선다. 영국의 차기 총리로 유력한 리즈 트러스 외무부 장관이 총리로 취임하면 영국을 방문해 엑스포 유치전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국가적 행사 유치 활동과 관련 고 이건희 회장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서 이건희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자격으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태원 대한상의회의소 회장(SK 회장)이 지난 4월 22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기원 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대한상의회의소 회장(SK 회장)이 지난 4월 22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기원 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SK 회장, 부산 엑스포 유치 전념

최태원(63) SK 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바쁜 총수 중 하나다. 최 회장은 SK그룹 경영과 함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겸직하며 정·재계를 잇는 소통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2030 부산세계박람회(부산 엑스포) 유치위원회 민간 공동위원장까지 맡아 ‘3개의 모자’를 쓰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부산 엑스포 개최지는 향후 3차례의 경쟁 프레젠테이션과 유치 계획서 제출, 현지 실사를 거쳐 2023년 말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 투표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최 회장은 메타버스 기술을 차별화된 경쟁 포인트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수연 네이버 대표와 깜짝 회동을 통해 메타버스를 활용한 부산 엑스포 유치와 홍보 관련 논의를 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부산 엑스포 유치 홍보 활동을 위해 경제 전문 유튜브인 삼프로TV에 9월 패널로 출연할 예정이다. 9월 중순 일본을 찾아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의 만남도 추진 중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5월 2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5월 2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美 전기차 공장 조기 착공 검토

정의선(53) 현대차그룹 회장은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해 8월 23일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발효로 현대차·기아의 전기차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자 미국 사업 전반의 현안을 살피며 대응책을 모색하기 위한 행보다.

아이오닉 5나 EV6 등 현대차그룹이 현재 미국에서 판매 중인 전기차는 모두 한국에서 생산해 수출되고 있어 이 혜택에서 제외된다. 보조금 제외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과의 경쟁에서도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미국은 총 7400억 달러(약 966조4400억원) 규모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북미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한해서만 보조금 혜택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판매 중인 현대차의 전기차 5종과 플러그인하이브리드 5종에 대해 모두 7500달러(약 1000만원) 상당의 보조금 지급이 중단됐다. 현대차는 2023년 상반기에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던 미국 조지아 주의 전기차 전용 공장의 착공 시점을 올해 안으로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구광모 LG 회장이 2021년 10월 서울 강서구 마곡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청년희망ON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구광모 LG 회장이 2021년 10월 서울 강서구 마곡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청년희망ON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구광모 LG 회장, 미래 먹거리에 집중 투자

구광모(45) LG 회장은 올해 취임 4년을 맞이했다. 2018년 40대 초반의 나이로 LG그룹 총수에 오르면서 젊은 총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과 집중’, ‘실용주의 리더십’으로 대변되는 리더십을 통해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도 그룹의 성장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적도 향상됐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21년 LG그룹의 공정 자산 총액은 167조5000억원으로 구 회장 취임 직전 해인 2017년 123조1000억원보다 36.1% 뛰었다. 매출액은 2017년 127조3960억원에서 2021년 147조620억원으로 15.4% 늘어났다.

지난 4년간 사업 포트폴리오 재정비 작업을 통해 스마트폰·태양광 등 안 되는 사업을 과감하게 접고 인공지능(AI)·배터리·전장·바이오·친환경 클린테크 등 미래 먹거리 사업에 전폭적으로 투자하면서 성장 기반을 구축했다. LG그룹은 2026년까지 한국에만 총 106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 중 43조원을 배터리·전장·차세대 디스플레이·인공지능(AI)·바이오 등 성장 분야에 집중 투자해 미래를 준비한다는 계획이다.

구 회장은 9월 중 LG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의 생산 공장이 있는 폴란드로 가 배터리 등 그룹의 핵심 사업을 현지 지휘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에서 5대 그룹 총수들을 부산 엑스포 특사로 임명하는 안을 검토 중인 만큼 구 회장이 폴란드에서 부산 엑스포 유치 활동에 힘을 보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오른쪽)이 9월 2일 베트남 호찌민 시에서 열린 투티엠 에코스마트시티 착공식에서 판 반 마이 호찌민시 인민위원장을 만나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사진=롯데그룹 제공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오른쪽)이 9월 2일 베트남 호찌민 시에서 열린 투티엠 에코스마트시티 착공식에서 판 반 마이 호찌민시 인민위원장을 만나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사진=롯데그룹 제공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베트남 현지 사업 점검

신동빈(68) 롯데그룹 회장은 8·15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복권 받은 직후 신사업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롯데그룹은 앞서 5월 신성장 분야인 헬스앤웰니스·모빌리티·지속 가능성 부문을 포함해 화학·인프라·유통 등 핵심 산업군에 향후 5년간 37조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신 회장이 집행 유예 신분을 벗어나면서 그동안 주춤했던 글로벌 경영 활동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신 회장의 첫 해외 출장지는 롯데마트·롯데호텔·롯데건설 등 19개 계열사가 진출한 베트남이다. 여러 계열사가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만큼 현지 사업 점검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신 회장이 이번 베트남 출장에 장남인 신유열 롯데케미칼 일본지사 상무와 동행했다는 점이다.

신 상무는 올해 5월 롯데케미칼 일본지사에 합류했고 일본 롯데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 부장도 겸직하고 있다. 신 상무는 신 회장과 함께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나 롯데 베트남 사업 전반에 대해 논의했다.

2023년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롯데몰 하노이와 롯데건설이 수주한 스타레이크 신도시에 방문하고 롯데건설이 건설 중인 투티엠 에코스마트시티 착공식에도 동행했다. 신 상무가 공식 석상에 등장하면서 재계에선 롯데그룹이 3세 승계를 위한 경영 수업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돋보기]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왼쪽)과 정기선 HD현대·한국조선해양 사장. 사진=각 사 제공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왼쪽)과 정기선 HD현대·한국조선해양 사장. 사진=각 사 제공
한화·현대중공업그룹, 3세 김동관·정기선 경영 전면에

최근 주요 그룹에서는 세대교체 작업이 한창이다. 한화그룹에서는 김승연(71)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이 40세의 나이로 부회장에 올랐다.

김 부회장은 승진과 동시에 기존 한화솔루션 전략 부문 대표이사에 더해 (주)한화 전략 부문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략 부문 대표이사도 함께 맡게 됐다. 한화그룹의 핵심 사업인 우주항공·방산 부문을 총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이다.

김 부회장은 한화그룹의 미래 먹거리 사업과 관련된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 등을 진두지휘해 왔다. 그린 에너지와 우주 항공 사업 등 미래 전략 사업 발굴·투자 등을 책임지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해외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방산 사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안정적 수익 구조를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 부회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스페이스허브 팀장을 맡아 누리호 엔진을 납품하고 ‘뉴 스페이스’ 시대를 준비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한화솔루션 큐셀부문이 미국과 유럽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김 부회장의 역할이 컸다. 김 부회장은 태양광 부문의 실적 개선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12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김 부사장의 지휘 아래 한화솔루션 큐셀부문(한화큐셀)은 한국을 포함해 미국·독일·영국 등 주요 시장에서 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현대중공업그룹에서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41) HD현대·한국조선해양 사장이 미래선박·수소연료전지·디지털·헬스케어 등 신사업을 진두지휘하며 차기 총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정 사장은 올해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지주회사 사명을 현대중공업지주에서 HD현대로 변경했다. 제조업 중심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지주회사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정 사장은 올해 1월 세계 가전 전시회(CES) 2022에서 선박 자율 운항, 로봇, 해양 수소 밸류 체인 등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 사장 주도로 2020년 설립된 선박 자율 운항 솔루션 전문 회사 아비커스는 2021년 한국 최초로 선박 완전 자율 운항에 성공했다. CES에서 정 사장은 “자율 운항 기술을 기반으로 한 해양 모빌리티가 우리의 새 미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 운항 친환경 기술로 시장을 선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비커스는 포항운하에서 12인승 크루즈의 완전 자율 운항에 성공한 바 있고 최근에는 세계 최초로 자율 운항 기술을 활용, 미국 프리포트에서 출발해 한국에 입항하는 대형 상선의 태평양 횡단에도 성공했다. 이번 자율 운항 시스템의 성공으로 상용화에도 성큼 다가섰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