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가격 반영까지는 시간 걸려…물류비·인건비·에너지 가격 상승도 가격 인상 압박 요인

신라면 1개당 900원에서 1000원으로 오르는 등 식품업계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한국경제신문]
신라면 1개당 900원에서 1000원으로 오르는 등 식품업계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한국경제신문]
급등했던 밀가루·팜유·대두 등 국제 농산물 가격이 다시 떨어지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고공행진하던 세계식량가격지수가 5개월연속 하락했다. 전쟁과 기후 변화 등 공급 위기를 초래했던 악재들이 예상보다 큰 타격을 주지 않은 영향이다. 세계 곡창지대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이 8월부터 다시 열렸고 미국·호주·러시아 등 다른 곡물 주산지의 작황도 좋았다.

지난 6월 말 미국 농무부가 발표한 파종 면적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와 내년 미국의 밀·옥수수 파종 면적이 시장 예상치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황 데이터가 예상보다 좋게 나오자 선물 가격 상승을 이끌었던 투기 수요도 빠졌다. 공급 차질 공포감에 올랐던 투기 수요가 약해지면서 국제 선물 가격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제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자 올해 4분기에는 주요 곡물의 수입 단가도 하락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곡물 수입 단가가 떨어지는 것은 7개 분기 만이다.

원자재 가격 상승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애그플레이션(곡물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찍고 내려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환율이 급등하고 물류비와 인건비가 오르면서 한국 식품 기업과 소비자들이 체감할 정도의 식품 물가 안정화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나온다. 팜유 대란, 어떻게 끝났나 먼저 4월 식탁 물가를 덮쳤던 팜유 대란의 결말부터 살펴봤다. 9월 21일 기준 팜유 국제 선물 가격은 연중 고가 대비 45% 하락했다. 대란까지 벌어졌던 팜유 가격이 몇 개월 사이 급락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급 차질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올랐던 팜유 가격이 안정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팜유 대란은 전 세계 팜유 공급의 60%를 담당하는 인도네시아가 수출을 금지하면서 시작됐다. 지난 4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식량 안보 위기를 우려해 팜유 원유를 비롯한 파생 상품 다수의 수출을 제한했다. 팜유는 케이크·식용유 등 식품부터 화장품·샴푸 등 생활 소비재까지 사용 범위가 광범위하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출 금지를 내리자 세계 식용유 가격은 한때 50% 폭등하기도 했다.

한국도 팜유 대란의 나비 효과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무역협회 수출입 실적 자료를 보면 톤당 팜유 수입 단가는 올해 1월 1343달러에서 4월 1669달러까지 뛰며 정점을 찍었다. 5월과 6월에도 1600달러대를 유지하던 팜유의 수입 단가는 8월 1298달러까지 내려앉았다.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이었던 1월보다도 낮은 가격이다.

팜유 가격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5월 말부터 수출 제한을 풀면서 빠르게 안정화됐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출 제한을 푸는 데 그치지 않고 7월 중순부터 8월 31일까지 모든 팜유 제품에 부과하는 수출세를 한시적으로 철폐했다.

인도네시아가 국내 팜유 가격을 안정화하기 위해 수출을 제한했지만 재고가 급격하게 쌓인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수출을 재개한 이후에도 쌓인 재고 때문에 생산 농가가 피해를 보자 규제 완화를 넘어 지원책을 꺼낸 것이다.우크라이나 흑해 수출길 재개되자 곡물 가격 안정화
우크라이나의 밀 수확 상황. 사진=REUTERS
우크라이나의 밀 수확 상황. 사진=REUTERS
밀·대두·옥수수 등 주요 곡물 선물 가격도 하락세다. 우크라이나 수출길이 다시 열리고 미국과 남미 등 세계 곡창지대에서 곡물 수확이 안정적으로 이뤄지자 투기적 수요까지 사라지면서 큰폭으로 가격이 떨어졌다.

올해 2월 말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밀 국제 선물 가격은 6월부터 하락세를 탔다. 9월 21일 기준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밀 선물 가격은 3월 연고점 대비 약 37%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 12개월로 기간을 넓히면 여전히 17% 오른 가격이다.

상반기 밀 가격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밀과 옥수수 수출이 각각 세계 5위(8%), 3위(13%)인 곡물 대국이다. 해바라기씨유 수출량은 세계 47%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흑해 수출길을 봉쇄하면서 전 세계 식량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불거졌고 국제 곡물 선물 가격도 급등했다. 우크라이나산 곡물은 90% 이상이 흑해 항구를 통해 수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7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식량 수출 재개에 합의하면서 8월부터 우크라이나의 흑해 수출길이 다시 열렸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따르면 8월 1일 이후 9월 18일까지 165척의 선박이 370만 톤의 농산물을 싣고 항구를 떠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8~9개월 안에 6000만 톤의 곡물을 수출할 계획이다.

러시아의 밀 수출이 증가하면서 공급량이 늘어난 것도 밀 가격 하락의 원인이다. 미국 농림부에 따르면 올해 러시아의 밀 수출은 전년보다 200만 톤 늘어난 3800만 톤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농림부 역시 9월 발표에서 2022년 하반기에 최대 3000만 톤의 곡물을 수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상반기에 곡물 가격 상승을 이끌었던 공급망 차질이 예상보다 큰 타격이 없었기 때문에 가격이 안정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김종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상반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기상 이변에 대한 우려가 겹치고 선물 시장에 투기 수요까지 따라붙으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오버슈팅’한 것”이라며 “기상 이변 이슈가 주요 작황 지역에서 심하지 않았고 전쟁에 따른 수출 제한도 완화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곡물 가격 급등분이 반락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곡물 가격 떨어지는데 식품 가격은 왜 오를까글로벌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4분기에는 주요 곡물의 수입 단가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곡물 수입단가가 하락한 것은 7개 분기 만이다.

곡물 수입 단가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국의 장바구니 물가는 점점 오르고 있다. 그동안 원가 인상을 감내해 왔다는 식품업계가 줄줄이 가격 인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식품업계에 따르면 오뚜기는 10월 10일부터 라면 값을 평균 11% 인상한다. 진라면은 620원에서 716원으로, 진비빔면은 970원에서 1070원으로, 진짬뽕은 1495원에서 1620원으로 가격이 오른다.

앞서 라면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농심은 9월 15일부터 신라면·너구리 등 주요 라면의 출고 가격을 11.3% 인상했다. 팔도도 10월 1일부터 라면 12종의 가격을 10% 정도 인상한다.

과자 값 인상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오리온은 초코파이·포카칩 등 16개 제품의 가격을 평균 15.8% 인상했다. 농심은 새우깡·꿀꽈배기 등 23개 제품의 출고가를 5.7% 올렸다.

식품업계는 원자재 가격이 떨어져도 식품 가격 인상 요인이 지속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달러가 유례없는 강세를 보이면서 수입 단가 하락에는 제한이 있고 운임비·인건비 등 제반 비용이 줄줄이 올랐기 때문이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이론상 선물 가격이 물가에 반영되기까지 3~6개월이 걸린다고 하지만 시장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며 “환율이 너무 올라서 곡물 수입단가가 떨어져도 무의미하고 에너지비와 물류비가 급등하면서 가격 인상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신중론도 여전하다. 농산물 수급이 불안정한 데다 전쟁 심화와 이상 기온 등 변수로 언제든 가격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여전히 국제 곡물 시장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앞서 바실리 네벤자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 재개 합의가 11월 시한 이후 연장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농촌경제연구원 관계자는 “공급망 체계가 한 번 충격을 받은 이후 정상화되고 있지만 하반기에 미국 가뭄 이슈가 있어 아직 가격 하락을 속단하기는 이르다”며 “글로벌 원자재 가격은 기후 요인이나 전쟁 심화로 인해 언제든 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