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경기 침체 예고한 월가…미국 외 국가들이 희생 치를 수도

[글로벌 현장]
거세진 글로벌 긴축 도미노…“산타 랠리는 없다”
베트남 중앙은행은 9월 23일 기준금리를 종전 연 4.0%에서 5.0%로 한꺼번에 100bp(1bp=0.01%포인트)나 올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베트남 동 환율이 달러 대비 되레 약세를 보인 것이다. 미국 외 국가들이 어떤 긴축 정책을 내놓든 ‘강달러’를 막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왔다.

뉴욕 월스트리트에선 ‘물가 급등→경쟁적 금리 인상→경기 침체’ 시나리오의 현실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국 외 국가들이 더 큰 희생을 치를 수 있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

내년까지 고강도 긴축 예고한 미 중앙은행

미국의 기준금리는 현재 연 3.0~3.25%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를 세 차례 연속 75bp 올렸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준금리는 2008년 1월 이후 14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렇게 가파르게 금리를 올리는 것은 물가 상승 때문이다. 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 6월 9.1%(작년 동기 대비)로 최고점을 찍었다가 7월 8.5%, 8월 8.3%로 소폭 떨어지는 데 그치고 있다.

반대로 고용 시장은 매우 견조한 상태다. 8월 기준 실업률은 3.7%로, 역대 최저치(3.5%) 대비 조금 높은 수준이다. 물가와 고용 지표가 미 중앙은행(Fed)을 센 긴축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Fed의 향후 행보다. FOMC 위원들의 금리 전망을 보여주는 점도표를 보면 올해 말 예상 금리는 연 4.4%다. 3개월 전 예상치(3.4%) 대비 1%포인트나 높다. 내년 전망치는 4.6%다. 6월(3.8%)과 비교하면 0.8%포인트 상향 조정됐다.

월가에선 Fed가 11월 또다시 75bp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초까지 인상 행보를 이어 가고 1년 넘게 고금리를 유지할 것이란 예상이다. 2024년은 돼야 금리 인하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의 강경한 발언 때문이다. 파월 의장은 최근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다”며 “물가상승률이 (우리 목표치인) 2%를 향한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 금리 인하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월가는 줄줄이 최종 금리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골드만삭스는 이번 금리 인상기의 최종 금리 수준을 연 4.75%로 종전보다 0.5%포인트 올렸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바클레이즈는 한 발 더 나아가 내년에 기준금리를 5.0%까지 인상할 것이라고 봤다. 연내 1.25%포인트를 추가로 올린 뒤 내년 두 차례에 걸쳐 0.25%포인트씩 올릴 것으로 예상했다.

또 다른 증권사인 암허스트피어폰트는 최종 금리 전망치를 5.25%까지 높였다. 요즘과 같은 고물가를 잡으려면 긴축을 대폭 강화하는 방법 외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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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너무 떨어진다”…금리 인상 도미노


미국이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자 미국 외 국가들의 통화 당국이 더 바빠졌다. 인플레이션 억제는 물론 환율 급락까지 막아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국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확대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수입 물가가 더 뛰면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다.

9월에 금리를 올린 국가들 중 스웨덴 중앙은행의 행보가 특히 주목을 끌었다. 한 번에 100bp나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스웨덴 기준금리는 현재 연 1.75%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캐나다·스위스·남아프리카공화국 중앙은행은 각각 75bp씩 금리를 인상했다.

75bp는 아니지만 평소보다 큰 폭인 50bp 올린 국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노르웨이·인도네시아·필리핀 등이다. 대부분 국가들의 금리는 10여 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각국마다 “물가 상승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며 추가적인 금리 인상을 예고한 점도 공통적이다.

다만 영국 등 일부 국가의 인상 폭이 미국(75bp)보다 좁은 데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영국은 지난 8월 기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작년 동기 대비 9.9%로, 미국(8.3%)보다 훨씬 높았다.

물가를 잡으려면 영국이 더 센 긴축에 나서야 했을 상황이다. 이번 금리 인상에도 영국의 기준금리는 연 2.25%에 그쳤다. 미국(3.0~3.25%)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다. 영국 파운드화가 달러 대비 37년여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선진국 중에선 가장 빠른 편인 작년 12월부터 금리 인상에 착수했던 영국이 금리 인상 속도를 더 높이지 못하는 것은 경기 침체 우려 때문이다. 영국 중앙은행은 이번 통화 정책 회의 이후 내놓은 성명서에서 “영국은 이미 경기 침체에 진입했을 수 있다”고 자체 평가했다.

영국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신통치 않다. 작년 3분기·4분기에 각각 0.9%, 1.3%에 그쳤다. 올해 1분기와 2분기엔 0.8%와 마이너스 0.1%로 더 둔화했다. 물가 억제와 성장 진작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졌을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영국이 신흥국과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며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제 글로벌 달러 강세 현상에 적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자산 배분을 고민해 온 한국의 ‘서학개미(해외 투자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월스트리트에선 미 경제와 증시 부진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데 무게를 싣고 있다.

‘신흥 채권왕’으로 불리는 제프리 건들락 더블라인캐피털 창업자는 “경기 침체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내놓은 투자 메모에서 “미국의 장·단기 국채 금리 역전은 확실한 침체 예고”라며 “Fed가 결국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춰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표적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손성원 로욜라메리마운트대 교수는 “역사적으로 보면 양적 긴축(QT)부터 실제 침체까지 평균 30개월이 걸렸다”며 “이번엔 기업 재고를 한꺼번에 터는 과정에서 경기 둔화가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침체 시점이 훨씬 앞당겨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르면 내년부터 경기 침체가 본격화해 1년 정도 지속될 것이란 게 손 교수의 얘기다. Fed는 올 3월부터 QT를 개시했고 시장에서 약 3조 달러의 유동성을 거둬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연내 증시 전망은 밝지 않다는 분석이다. 씨티그룹의 더크 윌러 전략가는 “Fed가 강력한 매파(통화 긴축 선호)로 변신함에 따라 내년 미국의 침체 가능성이 커졌다”며 “오는 11월 초로 예정된 중간 선거 이후에도 증시 분위기가 반전되지 않은 채 ‘산타 랠리’ 기대를 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블리클리투자자문의 피터 부크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머지않은 시점에 역대 최대 규모의 증시 거품이 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대규모 부양책을 내놓았다가 순식간에 긴축으로 방향을 선회한 데 따른 부작용이 본격화할 것이란 논리다. 부크바 CIO는 “수년간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 행진을 지속하면서 거품이 누적돼 왔다”고도 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마이클 하트넷 최고투자전략가(CIS)는 “현재 투자 심리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최악”이라며 “통화 긴축과 지정학적 위기 심화, 글로벌 경기 둔화 전망이 주가 하락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당분간 현금 보유액을 늘리고 관망세를 유지하면서 재투자 시점을 모색하는 게 현명하다고 월가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뉴욕(미국)=조재길 한국경제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