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바람 불며 한 병 10만원짜리도 완판…격변 시작된 한국 소주 시장

[비즈니스 포커스]
2월 25일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원소주 팝업 스토어 행사에서 고객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월 25일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원소주 팝업 스토어 행사에서 고객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 소주 시장이 격변을 맞고 있다. 기존의 희석식 소주보다 다소 높은 가격의 증류식 소주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었다. 셀럽 효과와 인증샷 열풍, 젊은층의 프리미엄 소비 트렌드가 수요를 부추겼다. 주류업계는 물론 편의점업계도 전통주 개발 업체와 손잡고 증류식 소주 시장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어른들의 포켓몬 빵. 가수 박재범 대표가 운영하는 주류 기업 원스피리츠가 올해 2월 내놓은 원소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팝업스토어(임시 매장)와 온라인 판매로 시작한 원소주는 출시되자마자 연일 품절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만 해도 업계는 연예인 마케팅쯤으로 치부하며 원소주의 흥행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익숙했던 희석주가 아닌 상대적으로 낯선 증류주이고 가격이 1만4900원(용량 375mL, 알코올 도수 22도)으로 초록색 병에 담긴 기존 소주(대형마트 기준)보다 10배는 비쌌기 때문이다. 또 하루 판매량 제한을 두고 있어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가성비보다 가심비를 선호하는 소비 트렌드가 주류업계로 이어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젊은 세대의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이 증가하면서 위스키와 와인 등 비싼 주류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자연스럽게 원소주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졌다. Z세대가 증류주인 원소주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랐다. 이들은 단순히 소주를 사 마시지 않았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구매했다고 ‘인증’했고 선물했다고 ‘인증’했다. 비싼 데다 구하기 어렵다는 희귀성이 오히려 이들의 인증 심리를 부추겼다.

네 차례의 오프라인 팝업에서도 준비된 물량이 모두 소진되는 등 완판 행진이 계속되면서 원소주는 라인업을 확대했다. 원스피리츠은 기존 원소주 오리지널 제품 외에 지난 7월 편의점 GS25에 단독 판매하는 오프라인 전용 상품 ‘원소주 스피릿’을 내놓았다. 이어 9월 기존 제품보다 알코올 도수(28도)를 높이고 소비자 가격(2만1900원)도 올린 ‘원소주 클래식’을 출시했다.

특히 원소주는 GS25와 만나며 파급력을 키웠다. 둘째 라인인 ‘원소주 스피릿’은 가격을 2000원 낮추면서 숙성 과정을 줄였다. 하지만 GS25에 들어오는 물량은 하루 두세 병밖에 안 된다. 새벽부터 동이 난다. 이 지점이 또 한 번 젊은 세대를 자극했다. 편의점 주소비층인 2030세대는 동네 구석에 있는 GS25를 찾아다니며 원소주 득템(특정 아이템 구매 성공)을 즐기기 시작했다. 원소주 스피릿은 출시 두 달 만에 누적 판매량 100만 병을 돌파했다. 7∼8월 GS25의 증류식 소주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81% 뛰었다. 전체 소주 매출에서 2% 수준에 그쳤던 증류식 소주 매출 비율은 25.2%까지 늘었다.

현재까지 원소주, 원소주 스피릿, 원소주 클래식의 총 판매량은 170만 병 이상이다. 매출은 100억원을 훌쩍 넘겼다.

편의점 CU와 세븐일레븐 등도 증류주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CU는 원소주 스피릿을 잡기 위해 ‘빛소주’를 출시했다. 1945년부터 3대째 전통주를 연구·제조·개발하고 있는 경남 창녕의 ‘우포의 아침’과 손을 잡았다. 도수에 따라 ‘빛24(알코올 24도)’, ‘빛32(알코올 32도)’ 2종으로 구성됐다. ‘빛32’는 375mL 용량에 가격은 1만2900원이다. 원소주 스피릿의 편의점 판매 가격과 같다. 세븐일레븐은 조만간 가수 임창정 씨가 충북 청주의 전통주 제조사와 손잡고 선보이는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 ‘소주 한 잔’을 판매할 예정이다.

기존 주류 강자들도 증류주 열풍에 뛰어들었다. 한국 소주 시장 1위인 하이트진로가 지난 8월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 ‘진로1924 헤리티지’를 선보였다. 30도짜리 700mL 한 병에 10만원 정도다. 고가 소주임에도 초기 물량 1만5000병이 한 달 만에 완판됐다. 주로 30~40대가 구매했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에선 소비자가 몰려 하루 판매 수량을 1000병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팔리는 데 4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고 초기 물량을 준비했지만 한 달 만에 모두 팔렸다”며 “10월 중 두 배 늘어난 물량으로 판매를 재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 9월 야심 차게 준비한 신제품 ‘처음처럼 새로(360mL)’를 출시했다. 롯데칠성음료가 소주 신제품을 선보인 것은 2006년 처음처럼 이후 16년 만이다. 처음처럼 새로는 희석식 소주이긴 하지만 여기에 증류식 소주를 소량 첨가해 증류식 소주 맛을 냈다. 상대적으로 ‘건강’ 콘셉트도 강조했다. 기존 소주 제품과 달리 과당을 사용하지 않고 무설탕 소주로 만들었다. 출고가는 한 병(360mL)에 1095.6원으로 처음처럼(1162.7원)보다 낮췄다. 알코올 도수는 16도다.

업계에선 올해 증류식 소주 시장 규모를 약 700억원 정도로 추정했다. 증류식 소주 시장은 2011년 100억원대에서 2021년 450억원대로 증가했다.
용어설명
증류식 소주는 쌀과 보리 등의 재료를 발효한 뒤 증류해 만든 술이다. 희석식 소주는 ‘참이슬’, ‘처음처럼’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주다. 에탄올(주정)에 물을 타고 감미료를 넣는 대량 생산 방식이다. 1960년대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양곡을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하면서 희석식으로 제조 방식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희석주가 소주 시장을 이끌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