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베리부터 오뚜기까지…사회적 위기에 동참하는 ‘착한 기업’ 대표 주자들

[스페셜 리포트-어떤 브랜드가 마음을 파고드는가]
LG그룹은 독립운동기념관 리모델링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LG의 지원을 받고 있는 서울 ‘우당 이회영 기념관’의 전시물을 보고 있다. 사진=LG그룹 제공
LG그룹은 독립운동기념관 리모델링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LG의 지원을 받고 있는 서울 ‘우당 이회영 기념관’의 전시물을 보고 있다. 사진=LG그룹 제공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월가는 ‘차가운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골드만삭스·JP모간·모간스탠리 등은 리먼 브라더스발 금융 위기가 터진 2008년 탐욕의 상징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다.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 또한 탐욕스러운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에 대한 공격의 의미로 골드만삭스와 같은 대형 투자은행들을 타깃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이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정점과도 같은 월가에서 드물게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투자자가 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다. 월가의 내로라하는 투자자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점심 한 끼를 위해 수십억원을 기꺼이 지불한다.

버핏 회장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자로 불린다. 어린 시절부터 주식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30년대 이후 92세의 나이가 된 올해까지도 오랜 시간 본인만의 투자 철학과 원칙을 정립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장기간에 걸쳐 뛰어난 투자 성과를 지속하고 있다.

성과가 뛰어난 투자자는 많다. 버핏 회장이 특별히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투자자로서의 탁월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겸손·절제·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30년도 더 된 낡은 옷을 자주 걸쳐 입고 그가 20대 시절 65만 달러에 구입한 소박한 집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기부에도 적극적이다. “벌어들인 것은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니 소유에 집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차가운 자본주의의 전쟁터 한가운데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며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그의 신념과 태도야말로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다.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기업들에 버핏 회장은 가장 귀감이 되는 모델이다. 능력과 따뜻함을 두루 갖춘 버핏 회장은 그 자체가 브랜드인 셈이다.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 사진=연합뉴스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 사진=연합뉴스
달라진 기업의 목적, ‘이해관계인 모두의 이익’ 추구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 : Business Roundtable)은 미국 내 200대 기업 CEO들이 모인 협의체다. 애플의 팀 쿡,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블랙록의 래리 핑크 등이 모두 속해 있다. 미국에서는 영향력이 가장 큰 로비 단체 중 하나다.

BRT는 2019년 ‘기업의 목적’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기업의 목적은 단순히 주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고객과 노동자, 협력 업체와 지역 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인의 이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BRT는 1978년 이후 기업의 목적을 담은 성명서(Statement on the Purpose of a Corporation)를 발표하고 있다. 이 성명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수정돼 왔지만 ‘기업의 목적은 주주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을 줄곧 고수해 왔다. 불과 20여 년 전인 1997년 “기업이 주주의 이익과 이해관계인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못 박았던 것과 비교하면 이들이 새롭게 정의한 ‘기업의 목적’은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에서 기대하는 기업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실제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2022년 연례 서한을 통해 “전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된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모든 이해관계인을 위한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기업이 창출하는 이 가치를 모든 이해관계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최근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고객과 노동자를 넘어 사회의 발전에 공헌해 온 기업들은 오랜 시간 존경받아 왔다. 하지만 기업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존경’과 ‘애정’의 영향력은 과거와 비교해 오늘날 더욱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이 스웨덴의 발렌베리그룹이다. 1856년 설립된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을 모태로 5세째 경영을 승계하고 있다. 실제로 발렌베리그룹은 핵심 계열사 14개를 포함해 투자 회사만 130여 개가 넘는 유럽 최대의 기업이다. 현재 스웨덴 국내총생산(GDP) 3분의 1을 차지한다. 세계 최대 제지 회사인 스토라엔소, 세계 2위 가전 회사인 알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베어링 기업인 SKF 외에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스칸디나비아항공 등이 발렌베리그룹에 속해 있다.

경영권을 자식에게 승계하고 다양한 업종의 계열사를 거느린다는 점에서 발렌베리그룹은 한국의 ‘재벌’을 닮았다. 하지만 스웨덴 국민들의 발렌베리 가문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스웨덴의 세 가지 자랑거리로 복지 제도와 빼어난 자연환경 그리고 발렌베리 가문을 꼽을 정도다. 한때 스웨덴의 사민당은 대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도 ‘발렌베리그룹’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예외로 인정받았을 정도다.

물론 이와 같은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를 졸업할 것. 자력으로 해외 유학을 마칠 것. 해군 장교로 복무할 것’이라는 엄격한 원칙을 바탕으로 후계자를 교육하고 승계한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사회에 공헌을 지속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왔다. 발렌베리그룹의 이와 같은 경영 철학은 특히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해 왔다. 지금도 발렌베리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외교관을 지낸 라울 구스타프 발렌베리다. 그는 헝가리의 유대인 수십만 명을 스웨덴으로 탈출시키며 ‘스웨덴 쉰들러’로 불렸다. 그는 전쟁 직후 러시아에서 전사하며 지금도 전쟁 영웅으로 남아 있다. 사회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나서 힘을 보태 줄 것이라는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 15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발렌베리그룹이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스웨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1924년 촬영한 발렌베리 가문. 사진=연합뉴스
1924년 촬영한 발렌베리 가문. 사진=연합뉴스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노바티스는 화이자·로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제약사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노바티스가 특히 유명세를 탄 이유는 따로 있다. 제약사가 보유한 특허약의 권리를 빈곤국에서 포기한 최초의 제약 기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선 복제약에 대해서는 어떤 소송도 제기하지 않는다. 선진국에선 의약품의 가격을 전액 받고 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할인’해 주는 차별화된 가격 정책을 펼친다. 빈곤국 환자들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약을 구하고 고통을 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제 지금도 빈곤국에서 특히 많이 발생하는 ‘말라이아 치료약’은 만들어 팔고 있지만 돈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유통’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단지 좋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철저히 내재화했기에 가능한 경영 방식이다. 기업의 이윤과 사회적 공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것을 넘어 오히려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위기에 더욱 빛나는 '착한 기업'의 힘

한국에도 이와 같은 기업이 있다. 기업으로서 이익을 창출하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따뜻함’ 또한 중요한 성장 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기업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착한 기업’으로 일컬어지는 오뚜기와 유한양행 등이 대표적이다.

‘갓뚜기’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는 오뚜기는 농심에 이어 한국 라면업계 2위 브랜드다. 고 함태호 창업자는 어린이와 장애인 등을 돕는 활동을 오랫동안 꾸준히 펼쳐 왔다. “제 조카는 1987년 오뚜기의 도움으로 경북대에서 심장 수술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조카는 건강하게 잘 자라 의료인이 됐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20년도 더 지났지만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미담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가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담’만으로 착한 기업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니다. 오뚜기는 비정규직이 없는 회사로도 유명하다. 함영준 회장은 2016년 함태호 명예회장의 별세 이후 지분을 상속받으며 1500억원대의 상속세를 완납한 것도 편법을 동원해 상속세와 증여세를 피하려고 애쓰는 대기업들의 뉴스만 줄곧 봐 오던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오뚜기의 영향력은 시장이 위기를 맞으며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며 라면업계는 지난해부터 몇 차례 가격을 인상한 바 있다. 보통 이와 같은 가격 인상 소식에는 소비자들의 원성이 쏟아지기 마련이지만 오뚜기의 가격 인상 소식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웬만해선 가격 인상을 잘 하지 않는 오뚜기가 가격을 올렸을 정도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지난해에는 오뚜기의 가격 인상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놓은 한 시민단체 홈페이지에 소비자들이 직접 몰려가 오뚜기를 방어하고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팬덤은 경영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2분기 라면업계 1위인 농심은 한국 사업에서 24년 만에 영업 적자를 냈다. 이와 비교해 오뚜기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32% 증가했고 매출 또한 18% 늘었다.
오뚜기 후원으로 심장수술을 받은 어린이를 안고 있는 고 함태호 창업주. 사진=오뚜기
오뚜기 후원으로 심장수술을 받은 어린이를 안고 있는 고 함태호 창업주. 사진=오뚜기
한국 제약 기업 1조 클럽 중 하나인 ‘유한양행’도 착한 기업의 성공 방정식을 증명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악조건 속에서도 매출 2조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한 고 유일한 박사는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치하 당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유일한 정신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으로서는 드물게 1969년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현재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는 공익 법인인 유한재단으로, 1971년 타계한 유 박사의 유지에 따라 구축한 지배 구조다.

유한양행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던 대표적인 기업은 LG그룹이다. 특히 LG는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기념관과 유적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후손들에게도 남몰래 후원을 아끼지 않아 온 사실이 알려지며 ‘착한 기업’의 이미지를 얻었다. ‘기업이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한다’는 취지로 2015년 이후 ‘LG 의인상’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오고 있다. ‘재계 오너 일가 중 군대 제대로 다녀온 이가 없다’는 세간의 선입견은 LG에는 통하지 않는다. 형제 간 재산 다툼과 같은 볼썽사나운 꼴도 없었다. 재벌에 대한 반감이 짙은 한국에서 드물게 ‘사랑받는 기업’으로서의 무형적 가치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재벌이다.

갓뚜기와 BTS의 공통점

‘착한’, ‘따뜻한’이라는 이미지가 ‘유능함’이라는 키워드와 결합해 더욱 큰 폭발력을 발휘하는 것은 비단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월클(월드클래스)’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이제는 K-컬처의 대표 브랜드가 된 BTS가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전 세계적인 ‘아미’라는 강력한 팬덤의 힘이 존재했다. 한국의 전문적인 아이돌 시스템과 아티스트로서의 그들의 실력(유능함)이 전 세계 아미를 사로잡은 가장 큰 매력 요소가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BTS란 브랜드의 인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BTS는 초창기부터 그들의 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둬 왔다. 2018년 유엔 연설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목소리를 내라”고 외쳤던 그들은 2021년 유엔 연설에서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새 길을 찾는 것”이라며 희망을 얘기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 그 방향을 ‘선한 영향력’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BTS를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시킨 비결이다.

‘소비자는 브랜드에 돈을 바치지만 팬들은 브랜드에 에너지와 시간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 브랜드의 강력함을 표현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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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