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무력한 일본 직장인들…“수동적 성실함 있지만 자발적 적극성 결여돼”
[글로벌 현장]
2013년 9월 세계 4대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설립자인 헨리 크래비스는 미국 뉴욕을 방문한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베 전 총리가 뉴육증권거래소에서 의기양양하게 “바이 마이 아베노믹스(Buy my Abenomics)”라며 일본 투자를 권하던 때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일본의 경영인들이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구조 개혁을 미루고 있다는 게 크래비스 설립자가 말한 ‘움직이지 않는 리스크’였다.
꿈도 없고, 자기주장도 없고
같은 달 일본을 방문해서도 크래비스 설립자의 쓴소리는 이어졌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해 보길 바란다. 먼저 ‘꿈이 있습니까’, 다음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합니까’라고 물어보라”고 했다.
크래비스 설립자는 이미 10년 전 활력을 잃어 가는 일본과 일본인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5월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미래 인재 비전 백서에 따르면 ‘장래의 꿈을 갖고 있다’는 일본의 18세 고교생의 비율은 60%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중국과 미국 고교생의 96%와 94%가 꿈을 갖고 있다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한국의 18세 청소년도 82%가 꿈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국가와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답한 일본의 18세 청소년은 18%에 불과했다. 미국과 중국은 66%, 한국이 40%였다. 중고교 시절 미래의 진로를 결정한 일본 학생은 3.8%에 불과했다. 66%가 대학 졸업반 즈음에서야 장래 희망을 정했다. 미국과 한국 학생의 25.2%와 17.8%가 중고교 시절부터 진로를 정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지난 5월 아사히신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청소년기 장래에) 유명해지고 싶었습니까’라고 질문에 응답자의 73%가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820명)’, ‘자신에겐 그럴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564명)’, ‘유명해지면 행동에 제약이 심해질 것 같다(541명)’, ‘주목받는 것이 싫다(535명)’ 등의 이유였다.
‘유명해지는 건 이익일까요’라는 물음에 70%가 ‘이익이라고도, 손해라고도 보기 어렵다’, 16%가 ‘손해다’라고 답한 데서도 적극성을 잃어 가는 일본인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 데도 지극히 소극적이다. 일본 최대 광고 기획사 덴쓰 계열의 덴쓰종합연구소와 이케다 겐이치 도시샤대 교수가 공동으로 실시한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불매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일본인은 1.9%였다. 77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70위였다.
1위인 아이슬랜드인은 35.2%, 2위 스웨덴인은 23.5%가 불매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미국인도 5명 가운데 1명 이상(21.5%)이 불매 운동에 참여했다. ‘평화적인 데모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응답도 5.8%로 69위에 그쳤다. 15~29세 일본 젊은 세대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63.2%가 ‘사회 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얼굴이나 이름이 드러나는데 저항감이 있다(22.2%)’가 사회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참가할 지식이 부족하다(21.6%)’는 자신감 부족형이 뒤를 이었다.
20~30대 젊은층은 ‘데모는 사회 전체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거나 ‘데모는 자기만족이나 개인적인 원한으로 참가하는 것’이라는 응답이 50~60%에 달했다.
직장인도 무기력하다. 인재 정보 회사인 파솔종합연구소가 아시아·태평양 14개국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일본인들은 ‘현재의 직장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52%)’와 ‘이직(25%)이나 창업(16%)하고 싶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모두 최저였다.
일본 직장인들은 지금 하는 일에 애착도 없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박차고 나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에너지도 없는 셈이다.
인도는 ‘현재의 근무지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응답이 86%에 달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80%를 넘었다. 한국·싱가포르·대만 직장인의 약 70%도 ‘현재의 직장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한편 한국의 직장인 가운데 이직이나 창업을 희망하는 응답자는 각각 40%와 30% 수준으로 일본 직장인의 2배였다.
미국 갤럽의 종업원 근로의욕(인게이지먼트) 지수에서도 일본은 5%로 세계 139개국 가운데 132위였다. 세계 평균은 20%,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은 34%였다. 아시아권에서는 몽골이 35%로 가장 높았다. 중국(17%)과 한국(12%)도 일본의 직장인보다 근로 의욕이 2~3배 높았다.
일본 최대 인재 정보 회사인 리크루트는 ‘일본인에게 수동적인 성실함은 있어도 자발적인 적극성은 결여돼 있다’고 분석했다.
주요국 가운데 가장 느린 승진이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된다. 일본 직장인들의 과장 진급 연령은 평균 38.6세, 부장은 44세였다. 중국은 28.5세에 과장, 29.8세에 부장으로 승진했다. 미국도 34.6세면 과장이 되고 37.2세에 부장 자리를 꿰찼다.
가뜩이나 일할 의욕이 없는데 승진까지 느리니 자기 계발에 적극적일 이유도 없었다. ‘별다른 자기 계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직장인 비율은 46%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국은 약 15%, 베트남은 2%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베트남과 한국의 직장인들이 퇴근 후에도 자신의 능력 개발을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뭔가를 배운다는 뜻이다.
직원 투자에 인색한 일본 기업들
직원들에 대한 투자에 극도로 인색한 일본 기업의 풍토는 일본인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의 인재 투자 규모는 미국이 1995~1999년 1.94%에서 2010~2014년 2.08%로 늘었다. 프랑스(1.78%)와 독일(1.20%), 이탈리아(1.09%) 등도 15년 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1995~1999년 GDP의 0.41%에 불과했던 인재 투자 규모를 2010~2014년 0.1%로 더욱 줄였다.
일본의 경영인들이 무기력한 직원들을 독려하는 것도 아니다. 경쟁에서 밀린 조직원이나 부진한 사업부를 과감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온정주의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진한 인재와 사업을 진심을 다해 키우지도 못하기 때문에 경영 자원의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토 구니오 히토쓰바시대 CFO교육연구센터장은 “일본의 경영인들이 ‘사람 좋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업은 점점 쇠퇴하는데 사원은 ‘가이고로시(쓸모없는 사람을 해고하지 않고 평생 고용함)’ 상태가 돼 회사와 직원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대부분의 일본 기업에서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가 오랫 동안 계속된 결과 오늘날 일본이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이라고 이토 센터장은 분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잿더미로부터 불과 30여 년 만에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무기력해졌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디플레이션을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한다. 20년 넘게 소득도, 물가도 오르지 않는 디플레이션의 사회가 한때 일본인의 내면에서 불타던 상승 의욕을 거세시켰다는 것이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월급이 잘 오르기보다 종신 고용이 보장되는 직장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며 “구성원의 상승 의욕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디플레의 무서움”이라고 말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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