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의 사용자성 인정해 ‘노란봉투법’ 논란 재점화
현대차·현대중공업도 같은 쟁점으로 소송 중

[법알못 판례 읽기]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2022년 3월 8일 열린 ‘공동 합의 성실 이행 촉구 택배 노동자 결의 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2022년 3월 8일 열린 ‘공동 합의 성실 이행 촉구 택배 노동자 결의 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CJ대한통운이 하도급인 대리점 택배 운전사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본 법원 판결이 나왔다. 하도급 노조와의 교섭 의무를 두고 벌어진 소송에서 원청이 패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청의 손을 들어준 과거 판례와 다른 결론이 나오면서 기업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다른 하도급 노조들도 “원청과의 교섭권을 보장해 달라”며 소송과 파업까지 불사할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입법을 더욱 강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법원도 택배노조 손들어 줘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부장판사 정용석)는 2023년 1월 12일 CJ대한통운이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을 기각했다.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와 교섭할 의무가 있다고 본 중노위 판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2018년 같은 쟁점으로 금속노조가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 1·2심에서 패소한 것과는 정반대 결과가 나왔다.

재판부는 “기본적인 노동 조건에 관해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정도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사용자에 포함된다”며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CJ대한통운의 주장은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사건은 중노위가 2021년 6월 택배노조가 CJ대한통운과 단체교섭할 권리가 있다고 판정하면서 비롯됐다. 앞서 2020년 11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CJ대한통운은 택배 운전사들의 사용자가 아니다”며 택배노조의 구제 신청을 각하한 지 7개월 만에 판정이 뒤집혔다.

당시 중노위는 “CJ대한통운이 실질적으로 택배 운전사 업무에 지배력이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봤다. CJ대한통운은 이 판정에 불복해 그해 7월 판정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택배노조는 이번 판결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CJ대한통운에 교섭을 요구할 것을 예고했다. 진경호 전국택배노동조합 위원장은 판결 선고 후 기자 회견을 열고 “CJ대한통운이 또다시 교섭을 거부하면 사장을 부당노동행위로 형사 고발하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교섭을 강제하는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CJ대한통운 측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라며 “판결문을 받는 대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뒤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 시내 한 CJ대한통운 사업소에서 직원이 택배물품을 옮기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시내 한 CJ대한통운 사업소에서 직원이 택배물품을 옮기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하도급 노조 교섭 요구 빗발치나

이번 판결은 산업계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중노위에 이어 법원까지 하도급 노조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원청을 상대로 공격적으로 단체교섭을 요구할 근거가 더욱 두터워져서다. 원청의 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로 인정되면 원청을 상대로 한 파업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하청 노조들이 더욱 강하게 원청을 몰아붙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선 1·2차 하도급 업체를 둔 완성차 제조사뿐만 아니라 외부 용역 업체에 청소나 경비 등을 맡기는 기업까지도 하도급 노조의 교섭 요구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선 “그동안 벼르고 있던 하청 노조들이 이번 판결 이후 한꺼번에 교섭 요구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1년 7개월 전 중노위가 택배노조의 원청 교섭권을 인정한 뒤 산업계에선 하도급 노조가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는 일이 잇따랐다.

현대차·기아·현대제철·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롯데글로벌로지스·한국GM 등이 같은 문제로 법적 다툼을 하고 있다. 최근 현대제철·대우조선해양·롯데글로벌로지스가 연이어 중노위에서 하도급 노조와 교섭할 의무가 있다는 판정을 받으면서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상황이었다.

한 대형 로펌 노동 전문 변호사는 “많은 기업이 앞으로 하청 노조가 교섭을 요구할 때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뇌에 빠질 것”이라며 “일단 사안마다 실질적 지배력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교섭 요구를 거부했다가는 부당노동행위로 몰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란봉투법 입법 움직임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노란봉투법은 당초 사측이 불법 행위를 한 노조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추진되다가 수정 과정에서 하도급 노동자의 원청 교섭권을 보장하는 내용까지 추가됐다.

민주당 관계자는 “구체적인 내용은 법원 판결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노란봉투법의 취지가 옳다는 판단이 사법부에서 나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진 위원장도 “이번 판결이 국회에서 노동조합법을 개정하는 움직임에도 물꼬를 터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법조계에선 현대중공업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이 문제를 두고 노사 양측 모두 혼란을 겪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금속노조와의 교섭 의무를 두고 법원에서 3년여간 법리 다툼을 벌이고 있다. 올해 안에는 결론이 날 것이란 관측이 많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갈수록 민감한 사안이 되면서 대법원이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내다봤다.


[돋보기]

연이어 하청노조 손들어 준 중노위…‘편파 논란’ 커지나

하도급 노동자의 원청 교섭권 요구에 불이 붙은 데는 최근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도 한몫했다는 평가다. 중노위가 기존 판례를 깨고 연이어 하청업체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주면서 하도급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더 높이는 계기가 됐다.

중노위가 노동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CJ대한통운에 대리점 택배 운전사 노조와 교섭하라는 판정을 내린 2021년 6월이다. 하청 노조의 원청 교섭권을 인정한 첫 사례였다.

그동안 대법원은 원청을 단체교섭 당사자인 ‘사용자’로 인정하려면 해당 하청 노조 조합원과 개별적인 계약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판결해 왔는데 이와 전면 배치되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 판정이 나온 뒤 다른 하청 노조들도 적극적으로 중노위의 문을 두드려 원청과의 단체교섭권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중노위는 2022년 3월 현대제철이 당진공장 하청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했다.

“현대제철은 하청 노조의 사용자가 아니다”는 충남지방노동위원회의 결론이 뒤집혔다. 교섭 대상을 산업 안전 분야로 한정했지만 하청 노조가 원청과의 교섭권을 주장할 근거가 하나 더 늘었다.

그해 12월엔 롯데글로벌로지스가 롯데슈퍼 물품 운송을 맡은 화물 운전사 노조와 단체교섭할 의무가 있다는 판정을 중노위에서 받아냈다.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신청은 기각됐지만 교섭권을 인정받은 판정 자체의 의미가 컸다는 평가다.

대우조선해양 거제조선소 점거 파업을 주도했던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도 비슷한 시기 원청에 직접 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원청과 단체 협약을 체결하거나 원청을 상대로 한 쟁의 행위는 금지된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하도급 노동자가 업무 전반에 걸쳐 교섭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모양새가 됐다.

중노위가 지방노동위원회 판정을 뒤집고 잇달아 하청 노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경영계에선 ‘편파 판정’이란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던 박수근 위원장이 2022년 11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지만 중노위의 성향이 단숨에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다.

현재 중노위를 이끄는 김태기 위원장은 노동경제학 분야의 권위자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불법 파업과 노동 시장 양극화 등을 개선하자는 노동 개혁을 주장해 왔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