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 이익·영업 기밀 요구 독소 조항 대응책 부심
K-칩스법에 첨단기술 외국 공개 금지 삽입해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반도체법은) 근본적으로 국가 안보에 관한 구상이다. 반도체 보조금 지급을 통해 얻는 것은 국가 안보 목표의 달성”이라고 밝혔다.
보조금 지급 기준은 경제·국가 안보, 사업 상업성, 재무 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 개발, 사회 공헌 등 크게 6가지다. 미 상무부는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을 최우선 고려 요소로 꼽으며 지원 대상 기업에는 국방부를 비롯한 국가 안보 기관에 군사용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도 요구하기로 했다.
돈 보따리 풀어 보니 곳곳 ‘지뢰밭’
반도체 기업은 보조금을 신청할 때 재무 건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수익성 지표와 예상 현금 흐름 전망치 등 재무 계획서도 함께 제출해야 한다.
지원금 1억5000만 달러 이상을 받는 기업이 실제 현금 흐름과 수익이 전망치를 초과하면 지급한 보조금을 75%까지 환수하는 내용도 담겼다. 초과 이익은 다시 자국 반도체 산업에 재투자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보조금을 받은 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설비 투자를 10년간 제한하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도 포함됐다. 자국 납세자 세금으로 보조금을 지원하고 세금을 공제해 주는 만큼 단돈 1달러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러몬도 장관은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이 회계 장부를 공개하도록 할 것”이라며 “백지 수표(blank check)는 없다”고 못 박았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사실상 족쇄가 된 보조금 신청을 앞두고 셈법이 복잡해졌다. 보조금을 받자니 초과 이익 환수, 재무 정보 공개, 첨단 반도체 시설 접근권 등 독소 조항으로 인해 경영권 침해와 영업 비밀 노출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최대 수출 시장으로 생산 설비 투자를 집중해 온 중국 시장에서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 50%와 낸드플래시 20% 정도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추가 투자가 막히면 첨단 제품 생산이 어려워진다. 보조금을 받지 않자니 미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반도체 원천 기술 없이는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하다.

미국 내에서도 반도체법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2024년 재선을 노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주요 입법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되는 반도체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신규 생산 공장을 유치한 텍사스·애리조나 주와 SK실트론의 미국 자회사 공장이 있는 미시간 주는 대표적인 경합주(스윙 스테이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에 공장 직원과 공장을 건설하는 노동자를 위한 사내 보육 시설을 설치하고 미국 내 인력 육성 정책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은 ‘외국 기업에 대한 퍼주기’ 논란을 불식하고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서라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반도체법이 법에도 없는 기준을 들이대며 기업에 좌파 정책을 강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하나의 산업 정책을 통해 너무 많은 목표를 달성하려다 이도저도 안 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며 “반도체법이 주렁주렁 뭔가가 달려 있지만 쓸데없는 것들뿐인 성탄절 트리가 됐다”고 비판했다.
까다로운 지급 기준에 보조금 혜택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기업인 인텔·마이크론·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는 모두 자국 내 증설 계획을 발표했고 대만 TSMC는 애리조나에 400억 달러(약 52조원),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173억 달러(22조4000억원)를 각각 투자해 반도체 생산 공장(팹)을 건설한다.
미국이 총설비 투자액의 5~15% 수준을 보조금으로 지급한다고 했기 때문에 업계는 삼성의 테일러 공장 투자액과 인센티브 등을 감안해 최대 3조원 안팎의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 미국 정부의 대출과 보증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날 수 있다.
보조금을 신청하면 중국 투자가 금지되는데 삼성전자가 2012년부터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에 투자한 누적 금액은 258억 달러(약 33조원)에 이른다.

인건비를 비롯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비용이 아시아보다 높아 보조금이 있더라도 제조업 기반이 미국에 있다면 최종 제품의 생산 비용이 높아져 경쟁력이 떨어진다.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들은 반도체법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의 점유율을 1%도 안 되게 올리는 효과가 있을 뿐이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것은 대만보다 비용이 44% 더 든다고 했다.
애리조나 공장 건설에 4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TSMC도 내부적으로 미국 투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TSMC는 최근 실적발표에서 대만에 공장을 짓는 것보다 비용이 4배 이상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첨단 제품은 중국→한국…국가 협상력 높여야”
개별 기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정부가 반도체법 시행에 따른 한국 기업에 대한 불이익 해소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이미 투자한 중국 공장의 가동은 보장받을 수 있게 정부 차원에서 시행령이나 보충 협약 등을 통해 한국 기업의 손해를 최소화하도록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막기 위해 2022년 10월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해선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를 1년간 유예했지만, 유예 기간을 더 연장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 기업들도 대응 방안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신제품과 첨단 제품은 한국의 공장에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칩스법’으로 불리는 반도체 설비 투자에 대한 추가 세제 지원안(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도 또 다른 해법으로 거론된다. 다행인 점은 K-칩스법 통과가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법안 처리 시급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3월 임시 국회에서 논의를 이어 가기로 했다.
전병서 소장은 “아직 통과되지 않은 한국의 반도체 지원법에 ‘첨단 기술 외국 공개 금지법’을 삽입해 개별 기업이 아닌 국가의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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