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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리뷰]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383회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에 대한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 / 사진 = 한국경제신문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383회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에 대한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 / 사진 = 한국경제신문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 전망 속에서도 전 세계적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법과 제도 도입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있다. ESG 경영에 목소리를 높이던 일부 기업은 이제 늘어나는 규제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ESG 법과 제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도 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테이블에서조차 각자 생각하는 ‘ESG 관련 법과 제도’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 정의와 범위가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ESG는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영문 첫 글자를 따 조합한 단어다. 환경에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수자원·생물 다양성·대기 오염 등이, 사회에는 노동·안전·보건·성평등 등이 포함된다. 사실 E, S, G라는 세 글자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법을 ESG 법이라고 뭉뚱그려서는 제대로 된 정책이나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가정해 보자. 노동은 ESG 중 하나인 사회(S)에 해당하므로 ESG 규제가 증가했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근로기준법은 1953년 제정된 이후 34차례 제·개정을 거친 법안인 만큼 오늘날 이야기하는 ESG 규제 강화 흐름과 무관하다고 봐야 할까. 어떤 일이든 그 시작은 정의하고 범주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ESG도 마찬가지다. ESG 법과 제도 도입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또는 대응책을 수립하든, 우선시해야 할 것은 ‘ESG 법과 제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ESG 법과 제도 두 가지 유형

최근 ESG 법과 제도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업이나 금융회사의 ESG 정보 생산·가공·유통을 위한 시스템을 정비하고 궁극적으로 ESG를 잘하는 기업과 금융회사가 소비자와 자본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과 제도다.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최근 우리가 직면한 대부분의 문제는 기업 활동과 관련이 있다. 기업은 여러 환경·사회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야기하는 주체이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집단이다.

ESG 잘하는 기업이 선택받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도태되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면 시민과 정부는 막대한 세금 투입 없이 환경·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ESG를 잘한 기업과 이를 반영한 투자자는 재무적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이에 최근 각국의 정부는 ESG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인프라 성격의 법과 제도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는 ESG 공시 의무화, 분류 체계 및 채권 표준 개발, 녹색 조달 및 그린 워싱 방지 정책 등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법이나 제도를 ESG 인프라 법과 제도 또는 ‘협의의 ESG 법과 제도’ 정도로 부를 수 있다.

또 다른 유형은 환경·사회 또는 지배구조와 관련한 기존 법과 제도를 강화하거나 신설하는 것이다. 사실 이 유형의 법과 제도는 금융권에서 촉발된 최근의 ESG 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다. 환경·인권·노동·안전 등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이와 관련한 정책은 최근의 ESG 붐과 무관하게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도입·강화돼 왔다. 최근 기후 변화·인권·안전 등 기타 ESG 요소와 관련한 법과 제도의 강화·신설은 가속화되는 기후 위기에 대한 우려와 시민들의 높아진 기대 수준을 반영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중대재해처벌법, 탄소가격제, 기업 인권 실사 등이 대표적 사례다.

ESG 제도, 국경을 뛰어넘다

다만 최근 E·S·G 개별 사안과 관련한 법과 제도가 과거와는 도드라진 특징을 보이는데, 그 영향력이 해당 법을 도입한 국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업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지난 40여 년간 꾸준히 확산된 세계화로 오늘날 기업 경영과 자본의 흐름은 이미 국경을 뛰어넘고 있다. 최근 ESG 경영과 투자가 일반화하면서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은 공급망 기업과 투자 대상 기업에 해당 국가의 법규 준수가 아닌 글로벌 스탠더드, 즉 미국이나 유럽 수준의 환경, 사회 및 지배구조 수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외 자본·수출 비율이 높은 한국 경제는 미국과 유럽의 환경·사회 관련 규제 수준 변화에 더 크게 노출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법과 제도의 도입 목적은 달라도 이를 ESG 관련 법과 제도에 포함해 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이러한 유형은 앞서 말한 ESG 시스템 구축을 위한 인프라 성격을 지닌 법·제도와 차이가 있는 만큼 이를 ‘E·S·G 개별 사안’ 또는 ‘광의의 ESG 법·제도’ 등으로 구분할 필요는 있다.

정보·자본 흐름 관리 위해선 ESG 기본법 필요

ESG는 인권·노동·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권리 보장과 국가의 책무 이행에 기여할 수 있는 시장 논리에 기반한 효과적 수단이다. 또 최근 세계 각국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지는 ESG 확산은 ESG가 개별 기업뿐만 아니라 국민 경제 전체의 미래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ESG도 이제 개별 기업이나 금융회사를 넘어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ESG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여러 정책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정부 부처 합동으로 ‘ESG 인프라 고도화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동안 각 부처에서 산발적으로 진행하던 정책을 종합해 발표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ESG에 대한 국가 차원의 비전 및 체계적 전략과 이를 조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ESG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지만 그 길은 매우 복잡하다. 정보와 자본의 흐름을 관리하는 ESG 시스템 구축이라는 과제와 함께 개별적인 E·S·G 사안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상황과 함께 해외 법과 제도 추진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대응 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여러 부처에서 중복 추진하는 정책을 정리해 필요하지만 누락된 정책을 파악하고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ESG 법·제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설정하고 관련 용어를 정리해 모든 것을 ESG로 포장,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기본법은 국가적 차원의 중요 목표 달성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전략과 계획 수립 그리고 각 이해관계인의 책무를 규정하는 법률이다.

또한 목표 달성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추진 조직을 지정하고 여러 부처나 법률이 관여된다면 그 관계를 정립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ESG는 환경부·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금융위원회·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거의 모든 부처와 해당 부처의 소관 법률과 연계된다. 5년 단임제 특성상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ESG 이슈를 정부 차원의 전략만으로 추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ESG는 미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다.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 방향과 전략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줄 ‘ESG 기본법’ 도입을 시급히 검토해야 한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1426호와 국내 유일 ESG 전문 매거진 ‘한경ESG’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더 많은 ESG 정보는 ‘한경ESG’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