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 20년 넘었는데 정권 교체 때마다 외풍
칼자루 쥔 국민연금 인사 ‘쥐락펴락’ 논란
포스코, 임기 완주 첫 CEO 나올까 주목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광화문 KT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광화문 KT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민영화 21년째를 맞은 KT가 사상 초유의 경영 공백 사태를 맞이했다.

연임 적격 판정을 두 차례나 받은 구현모 대표가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과 정치권의 지속적인 압박에 연임을 포기한 데 이어 윤경림 차기 후보까지 사퇴하면서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 KT는 박종욱 경영기획부문장(사장)이 대표이사 직무대행을 맡는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최근 재계에선 ‘주인 없는’ 소유 분산 기업의 지배 구조가 화두다. 소유 분산 기업은 재벌그룹과 달리 특정 대주주가 없는 기업이나 금융지주를 의미한다. KT·포스코·KT&G 등 민영화된 공기업과 우리·신한·하나·KB 등 금융지주가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2022년 말부터 금융권 최고경영자(CEO)들의 셀프 연임에 제동을 걸면서 장기 집권하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소유 분산 기업 CEO들의 향후 거취가 주목된다.

“호족 기업 안 돼” 셀프 연임 제동 건 정부

정부 여당, 금융 당국은 소유 분산 기업을 겨냥해 지배 구조 문제를 정조준하고 나섰다. 지난해 말 KT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황제 연임 등 내부 인사를 우선시하는 관행을 지적하며 군불을 지폈다.

참여연대는 정관에도 존재하지 않는 KT의 ‘현직 대표이사 연임 우선 심사’ 규정을 지적했다. KT는 2002년 민영화 이후 대표이사 공모제를 정관에 명시해 시행했지만 2006년 정관을 개정해 공모제 필수 조항을 삭제했는데 그 이후 남중수·이석채·황창규 등 이전 대표이사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손쉽게 연임에 성공했고 회삿돈으로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구현모 전 대표도 같은 방식으로 연임을 시도했다.

참여연대는 “KT의 현직 대표이사 연임 우선 심사 제도는 경영에 대한 내부 견제가 작동할 수 없게 하는 불공정한 경쟁 시스템이고 셀프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잘못된 제도”라고 꼬집었다.

올해 초엔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소유 분산 기업과 관련해 지배 구조를 문제 삼았다. 윤 대통령은 “과거 정부 투자 기업 내지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소위 ‘스튜어드십’이라는 것이 작동돼야 한다”면서 ‘주인 없는 회사’들의 지배 구조 선진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소유 분산 기업들의 대표이사들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며 토착화하는 호족 기업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해당 기업들의 투명한 경영 구조 확립과 단기 업적주의 타파를 위한 외부 집도도 필요하다”며 우리·신한·하나·KB 등 금융지주와 포스코·KT를 거론했다.
KT 차기 CEO 선임 관련 일지. 그래픽=박명규 기자
KT 차기 CEO 선임 관련 일지. 그래픽=박명규 기자
경영 공백 KT, 주가도 ‘뚝’

KT 사태에서 지배 구조는 표면적인 이유고 본질은 정치 외풍이라는 시선도 나온다. KT와 포스코는 민간 기업이 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취약한 지배 구조로 낙하산 인사와 부정 취업 청탁 의혹에 휩싸이며 정권 교체기마다 CEO도 교체되는 흑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를 내건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구현모 전 KT 대표의 연임 여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해 구 전 대표가 사퇴하면서 생긴 CEO 리스크에 KT 주가가 올해 들어서만 13% 이상 떨어졌다.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명분으로 과도한 ‘기업 흔들기’를 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소유 분산 기업은 확고한 지배 주주가 없고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여서 정부의 입김에 좌우되기 쉽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KT와 포스코홀딩스의 지분을 각각 9.99%, 8.99% 보유하고 있다.

KT 이사회에는 문재인 정부 때 영입돼 친노·친문으로 분류되는 인사 다수가 포진하고 있어 여권에선 구 전 대표와 함께 ‘이권 카르텔’이라고 비판해 왔다. 이에 사외이사들까지 줄사퇴가 잇따르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강철 사외이사는 지난 1월 자진 사임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대유 사외이사와 문재인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 출신인 유희열 사외이사도 사의를 표명한 상태다.

KT 사외이사 재선임에 도전했던 현직 후보 3인(강충구 고려대 교수·여은정 중앙대 교수·표현명 전 롯데렌탈 대표)도 3월 31일 주주총회를 앞두고 동반 사퇴했다. 이들의 사퇴 결정에는 KT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과 2대 주주인 현대차그룹(지분 7.79%)의 의결권 행사 방침 발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 사진=포스코 제공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 사진=포스코 제공
尹 정부 패싱 당한 포스코도 긴장

KT 사태로 같은 소유 분산 기업인 포스코, KT&G에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KT&G의 백복인 사장은 3연임으로 9년째 수장 자리 지키고 있고 포스코의 최정우 회장은 한 차례 연임에 성공해 5년째 회장직을 수행 중이다.

임기가 1년 남은 최 회장의 임기 완주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포스코는 2000년 민영화된 이후 정권 교체 시기에 맞물려 CEO도 교체되는 정치 외풍에 시달려 왔다. 최 회장 이전 포스코 수장 8명 가운데 정권 교체 후 임기를 채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전임 권오준 8대 회장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1개월 만인 2018년 4월 임기를 2년 남기고 중도 퇴진했다. 최 회장이 남은 임기까지 완주하면 포스코 사상 최초의 임기 완료 회장이 된다.

최 회장은 올해 초 재계 신년 인사회와 윤석열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스위스 순방 등 주요 행사에 줄줄이 불참해 윤 정부에서 패싱(배제) 논란이 불거지면서 ‘연임 후 중도 퇴진설’이 힘을 받고 있다. 지난해 태풍 피해 때도 대응 부실 논란이 불거져 정치권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아 왔다.

포스코그룹 지주사인 포스코홀딩스의 3월 정기 주주 총회를 앞두고 국세청이 정기 세무 조사에 착수하면서 문재인 정부 때 취임한 최 회장에 대한 퇴진 압박이 본격화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최근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포스코홀딩스의 주소지 이전 등 주요 상정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아 최 회장 체제가 재신임받았다는 평가다.

최 회장은 최근 지배 구조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최근 정기 주주 총회에서 ‘선진지배구조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TF를 통해 CEO와 사내·외 이사 선임 프로세스부터 이사회 운영 등 그룹 지배 구조 전반을 검토하기로 했다. 업계에선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소유 분산 기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부 정책에도 보폭을 맞추고 있다. 정부가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해 한국 기업의 기부금으로 판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포스코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부금 40억원을 납부했다.

KT도 기부금을 출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수혜를 본 기업들은 포스코를 비롯해 한국도로공사·한국철도공사·한국전력·KT&G·KT 등이 거론된다. 포스코는 당시 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 중 24%인 약 1억2000만 달러로 포항제철소를 설립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