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대기업엔 유리하지만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겐 불리한 ‘엔저’…일본은행 정책 고수할까

[글로벌 현장]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도쿄에 있는 제약 회사 사쿠마제과는 1월 20일 문을 닫았다. 일본인들이 아쉬움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114년의 역사가 끊기게 됐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다. ‘사쿠마식 드롭스’라는 이 회사의 대표 상품 때문이다.

지브리스튜디오가 1988년 발표한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에 등장한 바로 그 상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공습으로 엄마를 잃고 배고픔에 허덕이던 열네 살 오빠 세이타와 네 살 여동생 세츠코가 차례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반딧불이의 묘’에서 사쿠마식 드롭스는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된다. ‘1945년 9월 21일 나는 죽었다’로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는 숨이 끊어진 세이타가 먼저 죽은 여동생의 화장한 뼈를 간직한 도구였다. 부스러기만 남은 사탕 통에 물을 섞어 마시고 “정말 맛있다”며 기뻐하는 장면은 세계인을 울렸다.

사쿠마제과는 ‘원자재 가격 급등과 엔저로 인한 경영 악화’를 폐업의 이유로 들었다. 원자재 값 상승의 부담을 엔저가 증폭시키면서 지난 2월까지 일본의 무역 적자는 19개월 연속 적자를 이어 갔다. 지난 1월 무역 적자는 3조4996억 엔으로 사상 최대였다.

엔저로 문 닫은 114년 역사의 사쿠마제과

일본의 서민들도 고통스럽다. 지난해 실질 임금 상승률은 마이너스 0.9%였다. 월급이 찔끔 올랐어도 물가가 더 뛰어 실제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는 뜻이다. 일본의 실질 임금은 작년 12월까지 7개월 연속 마이너스였다.

그런데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엔저는 일본 경제 전체로 봐서는 플러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엔저는 일본에 축복인가, 저주인가’는 2022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일본 경제의 최대 논쟁거리였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엔저는 일본 경제에 축복이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큰 축복은 아니라는 점, 소수의 수출 대기업에는 축복이지만 중소기업과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엔저가 일본의 경제 주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먼저 기업부터 살펴보자. 일본의 주력 산업은 수출 제조업이다. 그런 만큼 엔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이익이 커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지면 자동차와 화학 등 주요 기업의 경상이익은 0.3% 늘어난다. 주요 19개 업종 가운데 엔저로 수익이 줄어드는 것은 전력과 같은 인프라 기업과 소매업뿐이다. 원재료의 수입 의존도가 높은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다. 2021년 일본 상장사의 영업이익은 71조 엔이었다. 엔화가 1엔 떨어지면 이익이 2130억 엔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21일 엔화는 달러당 151엔으로 32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1년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평균 110.80엔이었는데 2022년에는 132.43엔으로 1년 새 21.63엔(19.5%) 떨어졌다. 노무라증권의 추산대로라면 지난해 일본 주요 기업의 영업이익은 4조3000억 엔 늘어난다. 과거에 비해서는 부진한 편이다.

다이와증권에 따르면 2002년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지면 200대 기업의 영업이익은 0.7% 늘어났다. 2022년 1엔 하락할 때 영업이익 증가율은 0.43%로 거의 반 토막 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엔화가 강세를 나타내자 일본의 수출 대기업들이 생산 시설을 해외로 대거 이전한 영향이다.

일본의 전체 수출에서 수입을 뺀 무역 수지를 보더라도 엔저는 더 이상 반가운 요인이 아니다. 1995~1998년 달러당 엔화 가치는 80엔에서 140엔으로 떨어졌다. 이 때만 해도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질 때마다 연간 무역 흑자는 970억 엔씩 늘었다. 당시 일본의 주력 수출품인 TV와 자동차 판매가 늘어난 덕분이었다.

하지만 2011~2015년에는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지면 무역 수지가 160억 엔씩 적자가 났다. 기업들이 생산 시설을 해외로 이전한 데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화력 발전 비율을 급격히 높인 때문이었다. 일본은 에너지 자원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현재는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지면 무역 적자는 7000억 엔씩 늘어난다. 일본 최대 기업 도요타자동차의 지난해 손익을 분석해 보면 일본 제조 대기업의 현주소가 잘 나타난다. 도요타자동차는 2022 회계연도에 2조4000억 엔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1년의 2조9956억 엔보다 20% 줄어든 것이다.

엔저에 따른 환차익으로 1조850억 엔을 올리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1조6500억 엔을 까먹는 때문이다. 일본 최대 수출 제조 기업 도요타에도 엔저는 마냥 반가운 요인이 아닌 셈이다.

엔화 가치 떨어져도 수출 늘지 않아

제조업체들의 엔저 효과가 예전만 못한 데다 비제조업체들의 손실까지 반영하면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이익은 더욱 쪼그라든다. 엔화 가치가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작년 2분기(4~6월) 닛케이225지수를 구성하는 제조업체 110곳은 1조470억 엔의 환차익을 올렸다. 반면 비제조업종의 대표 기업인 소프트뱅크그룹 한 곳만 같은 기간 8199억 엔의 환차손을 봤다. 제조업·비제조업을 포함해 일본 기업 전체적으로 이 기간 엔저 효과는 4200억 엔까지 줄었다.

이마저도 대기업에 해당하는 얘기다. 386만 개에 달하는 일본 기업의 99.7%를 차지하고 일본 노동자의 69%를 고용하는 중소기업에 엔저는 악몽에 가깝다. 중소기업의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3%에 불과하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는 반면 수출 경쟁력 향상으로 누리는 이익은 쥐꼬리만하다는 뜻이다. 시장 조사 회사 데이코쿠데이터뱅크가 작년 8월 실시한 조사에서 ‘엔저로 실적이 악화됐다’는 중소기업이 80%를 넘었다. ‘이익이 늘었다’는 기업은 10%에 그쳤다.

가계에도 엔저는 부담이다. 미즈호리서치&테크롤로지에 따르면 달러당 엔화 가치가 130엔일 때 각 가구당 부담은 연평균 6만 엔 정도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사카이 사이스케 미즈호리서치&테크롤로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저소득층은 소비세가 3% 인상된 것과 같은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엔저는 일본 경제 전체에는 이익”이라는 구로다 총재의 진단은 소수의 대기업이 얻는 이익의 합이 중소기업과 가계가 받는 손실보다 크다는 의미다. 그의 진단대로 달러당 엔화 가치가 130엔이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 엔 늘어난다. 경제성장률을 0.19% 끌어올리는 효과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지면 일본 경제 전체적으로 1조5000억 엔의 이익이 늘어나면서 GDP가 0.29% 증가한다.

엔저가 일본 부활의 열쇠가 되려면 기업이 엔화 약세로 벌어들인 이익을 설비 투자 등 미래에 투자하느냐에 달렸다. 전통적으로 일본 기업들은 엔저로 이익이 늘어나면 설비 투자를 늘렸지만 최근 들어 그 효과가 크게 줄었다. 골드만삭스증권에 따르면 20년 전만 해도 일본 기업들은 엔화 가치가 10% 떨어지면 설비 투자를 1.7% 늘렸다. 반면 엔저의 설비 투자 증가 효과가 1.1%로 줄었다. 바바 나오히코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에는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 없는 지식 집약적 사업을 주로 남겼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떨어져도 수출이나 설비 투자가 늘어나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