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엑스오(XO), 키티’의 한 장면 / 자료=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엑스오(XO), 키티’의 한 장면 / 자료=넷플릭스
“한국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

미드(미국 드라마)에 난데없이 ‘고조선’이란 말이 튀어 나온다. 고조선뿐만 아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후삼국 시대의 연도까지 묻고 답하며 시험 공부를 한다.

4월 1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엑스오(XO), 키티’의 한 장면이다.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 인기작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스핀오프(번외편)이고 총 10부작으로 구성됐다. 촬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진행됐다. 배경만 한국이 아니다. 한국 문화가 드라마 전체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이야기 자체는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여학생 키티(애나 캐스카트 분)는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자랐다. 고등학생이 된 키티는 돌아가신 엄마의 흔적을 찾아가는 동시에 사랑하는 남자 친구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 한국의 국제학교로 전학을 온다.

그런데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기존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키티는 친구들과 함께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춘다. 명절에 전과 갈비찜을 요리해 먹는 장면도 나온다. 서울N타워·동대문디자인플라자·북촌 한옥마을 등 한국 곳곳의 명소도 카메라에 가득 펼쳐진다. 분명 미드를 보고 있지만 한드(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한국을 전면에 내세우다 보니 주 시청자도 한국인들에 한정되지 않을까. 그런데 예상을 뛰어넘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한국에선 일찌감치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반면 미국·영국에선 2위까지 올랐다. 이를 포함해 86개에 달하는 국가에선 10위권 안에 진입했다.
한국 사람들이 더 모르는 K-컬처의 파급력
한류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 그동안 한류는 ‘오징어 게임’, 방탄소년단(BTS) 등 전 세계에 열풍을 일으킨 특정 콘텐츠와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이젠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글로벌 팬들은 더 이상 한국의 특정 콘텐츠와 아티스트에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더 많은 작품과 아티스트를 찾아나서는 것은 물론 한국의 문화를 통째로 흡수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한류’라는 단어 뒤에 끊임없이 숫자를 붙여 왔다.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CCTV에 방영되고 인기를 얻은 이후 26년간 쭉 그래 왔다. 해외 콘텐츠를 베끼거나 수입하기 바빴던 수준에서 벗어나 콘텐츠를 수출하는 것은 물론 큰 사랑까지 받는 기적 같은 현상을 어떻게든 정의하고 분석해야 했으니 말이다.

먼저 H.O.T. 등 1세대 아이돌 음악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었던 1997~2000년대 초는 ‘한류 1.0’이라고 불렀다. ‘겨울연가’ 등 드라마가 아시아 지역에서 사랑을 받았던 2000년대 초·중반은 ‘한류 2.0’, 그 이후 아시아를 넘어서 다양한 지역으로 한국 콘텐츠가 확산된 때는 ‘한류 3.0’ 시기로 구분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류 4.0’ 시대를 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류 4.0은 K팝과 드라마라는 두 중심축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음식·패션·라이프스타일 등 한국 문화를 두루 알리는 것을 이른다. CJ ENM이 주최하는 세계적인 한류 축제 ‘케이콘(KCON)’을 떠올리면 된다. 케이콘은 글로벌 팬들이 현지에서 K팝 공연을 비롯해 한국의 음식과 화장품 등도 골고루 접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최근엔 이런 숫자 구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대 이상의 성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BTS가 활동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알리려고 하지 않아도 해외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과 관련된 것들을 발견하면 더 반가워하고 좋아하는 현상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미드에 뜬금없이 한국을 등장시킨 ‘엑스오, 키티’는 “어색하다”는 반응 대신 “신선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미국 연예 매체 할리우드리포터는 이 작품에 대해 “한국을 배경으로 한 10대 로맨스가 매력적”이라고 보도했다. 글로벌 평점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선 신선도 지수 80%를 기록했고 “낯선 공간에서 펼쳐지는 설렘”이 장점으로 꼽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다 보니 한국 관련 단어들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대거 등재되기도 했다. 전통 문화에 국한됐거나 지나치게 거창한 단어들이 올라간 게 아니다. ‘대박(daebak)’, ‘치맥(chimaek)’, ‘먹방(mukbang)’ 등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쓰는 용어들이 줄줄이 올라갔다. 한국 사람들만 K-컬처의 진정한 파급력을 잘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한류는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확산되고 있다.무한히 진화하고 발전하는 한류 ‘N.0’ 시대
놀라운 현상은 시장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4월 22일 한국의 한 아이돌 그룹이 미국 빌보드 글로벌 차트 1위에 올랐다. BTS·블랙핑크 등 이미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데뷔한 4인조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FIFTY)’가 주인공이다. 데뷔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고 한국에서 인지도를 충분히 쌓지도 못한 신생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한국의 K팝 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줬다. 게다가 이 그룹은 대형 기획사가 아닌 중소형 기획사 어트랙트에서 만들어 더욱 화제가 됐다.

피프티 피프티의 노래 ‘큐피드(Cupid)’를 들으면 K팝의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곡은 기존의 K팝 공식을 따른 정형화된 음악이 아니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면서도 가볍고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댄스 등 화려한 퍼포먼스를 내세우기보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는 노래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데뷔 전부터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K팝 그룹도 있다. YG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베이비몬스터는 정식 음원조차 발매되지 않은 프리 데뷔곡 ‘드림’으로 빌보드 ‘핫 트렌딩 송즈’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곡이 담긴 유튜브 영상의 조회 수는 4000만 회를 넘어섰다. 빌보드는 베이비몬스터에 큰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들을 ‘주목해야 할 K팝 아티스트’로 선정하며 “K팝 장르에 새 물결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피프피 피프티와 베이비몬스터의 사례를 통해 글로벌 팬들의 움직임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정 아티스트와 작품에만 열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K팝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갖고 다양한 아티스트와 앨범을 찾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K-콘텐츠 시장 역시 이전과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넷플릭스의 글로벌 순위 상위권에 한국 콘텐츠 다수가 올라가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됐다. K-콘텐츠의 형태와 정의도 달라지고 있다. 애플TV플러스에서 지난 3월 방영된 ‘더 빅 도어 프라이즈’는 미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미드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국 제작사가 만들었다. 한국 최대 규모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이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공동 제작했다. 드라마 총괄 프로듀서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맡았다.

총 10부작으로 나온 이 작품은 한 작은 마을에 ‘운명을 알려주는 기계’가 등장하며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현상을 담았다. 한국 제작사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기발하며 완성도도 높다. 비평가들의 호평에 힘입어 로튼 토마토에서도 신선도 지수 93%를 받았다.

2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어진 한류. 우리는 이 현상을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내심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징어 게임’과 같은 초대박 콘텐츠, BTS와 같은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진 스타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어김없이 ‘위기론’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한동안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개별 콘텐츠와 아티스트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커지는 ‘구심력’이 지배할 때는 리스크도 그만큼 커져 갔다. 하지만 이젠 중심에서 바깥으로 힘이 무한히 뻗어가고 여러 방식으로 확산되는 ‘원심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리스크도 함께 분산되고 약해지고 있다. 그래서 한류는 무한히 진화하고 발전하는 ‘N.0’ 시대를 열어 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디에나 흐르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며….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