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산업의 겉과 속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K-드라마 산업의 겉과 속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K-드라마 산업의 겉과 속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마스크걸’ 1위, ‘이 연애는 불가항력’ 4위, ‘힙하게’ 8위….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의 비영어권 TV 부문 주간(8월 21~27일) 순위에 오른 한국 드라마다. 넷플릭스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글로벌 OTT 디즈니플러스에서도 한국 드라마 ‘무빙’의 인기가 뜨겁다. 이 작품은 공개 직후 월드와이드 부문 1위에 올랐다.

더 이상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21년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열풍 이후에도 K-콘텐츠는 지속적으로 큰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드라마가 많은 관심을 받으며 한류의 새로운 축을 이루게 됐다. K-드라마의 인기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한두 편의 작품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작품이 매주 글로벌 OTT의 상위권에 오르고 있다. 이처럼 K-드라마는 ‘오징어 게임’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글로벌 시장에서 장기간 축포를 터뜨리고 있는 사이 한국에선 드라마 산업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하게 흐르고 있다. 20여 년의 한류 역사에서 위기론이 늘 있긴 했다. 그 위기론을 발판 삼아 더 매진하고 도약하며 한류가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K-드라마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이전과 다르다. 산업 구조 자체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며 파열음이 일어나고 있다. 화려한 성과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살펴보고 드라마 산업 전반을 재정비할 때가 온 것이다.창고에 방치된 100여 편의 드라마
드라마는 여러 장르 가운데 다소 늦게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짧고 쉬운 K팝이 먼저 인기를 얻었고 이후 2~3시간 분량의 K-무비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일본·중국·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인기를 얻는 데 그쳤다. 여러 회차에 걸쳐 길게 전개되다 보니 미국‧유럽 시청자로선 문화적 간극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견고한 장벽을 깨부수고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게 됐다.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2016년 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드라마 산업의 유통 구조가 확 바뀌었다. 각국에 일일이 드라마를 어렵게 판매하던 방식에서 나아가 일괄적으로 다수 국가에 작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통 기간이 줄어든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 국가씩 개별 판매를 할 때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와 해당 국가에 판매되는 시기의 격차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들어오면서 드라마가 제작된 직후 다수의 국가에 유통할 수 있게 됐다.

이같이 플랫폼의 변화가 드라마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K-드라마는 여러 나라의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K-드라마는 넷플릭스가 들어간 190여 개국 작품들에서도 가장 크게 주목받았다. 해외에서 특화됐던 스릴러·좀비물 등 장르물의 장점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특성을 가미해 새롭게 발전시킨 영향이 컸다. 다수의 작품들이 골고루 상위권에 진입한다는 것은 K-드라마의 인기가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미국 콘텐츠 제작이 차질을 빚고 있는 가운데 K-드라마는 그 대안으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미국의 작가·배우 조합의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미국 콘텐츠는 불가피하게 긴 공백기를 갖게 됐다.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 있던 미국 신작이 사라지자 그에 버금가는 K-드라마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됐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길게 드리우고 있다. 기존에도 위기는 있었다. 일본에선 혐한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했고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에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산업 구조 자체가 아닌 국제 정치적‧사회적 요인에 의한 위기였다.

지금의 위기는 크게 다르다. 드라마 산업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시작은 OTT의 등장과 성장이었다. 드라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그에 맞춰 제작사들이 많은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영화계 인력들도 드라마 제작으로 대거 넘어왔다. OTT에 따라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든 반면 OTT를 중심으로 드라마 시장이 성장을 거듭하자 업종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영화계 주요 감독부터 스태프들까지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며 K-드라마의 수준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드라마 작품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며 이전과 차원이 다른 경쟁 체제가 만들어졌다. 너무 많은 작품이 나오자 사람들은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게 됐다. 작품 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심화됐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극소수의 작품이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승자 독식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제외한 많은 작품들은 한창 방영 중일 때조차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소외됐다. 그럼에도 대작들과 경쟁하기 위해 평균 제작비를 계속 높이고 있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커지게 됐다. 투자하고도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최근엔 실컷 만들고도 방영하지 못하는 작품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 업계에선 제작사에서 드라마 기획부터 시작해 촬영까지 다 했지만 편성을 받지 못해 창고에 방치된 작품이 100여 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작품들의 편성 자체가 끝내 성사되지 못한다면 그동안 들어간 수많은 노력과 비용 모두가 물거품이 된다. 그중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대작은 편성에 실패한다면 제작사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현재 드라마 다수의 편성 가능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제작비 부담이 커지면서 방송사와 OTT가 드라마 편성을 줄이고 있는 영향이다. 방송사는 지상파·케이블 채널을 막론하고 드라마 편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OTT를 통해 화려하고 압도적인 스케일의 국내외 드라마를 접하게 된 시청자들이 웬만한 작품에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송사뿐만 아니라 OTT업계도 지갑을 닫고 있다. 대부분의 OTT는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으로 출혈 경쟁을 벌여 계속 적자를 내고 있다. 결국 드라마 비율을 낮추고 제작비 부담이 작은 예능 프로그램 등을 만들고 있다.이젠 산업 구조‧제도 재정비할 때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업계가 되살아날 방법은 있을까. 현재로서는 마땅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부터 해외 판매를 고려하기 때문에 국내외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한 출혈 경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제작비를 줄이기 힘든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각종 제도적 정비를 통해 제작사의 부담을 줄여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잘 만들어 납품한 작품조차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시스템부터 하나씩 보완해 나가야 한다. 특히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는 한국 창작자들에게 ‘재상영 분배금’을 주지 않는다. 재상영 분배금은 콘텐츠 시청 실적이 높을수록 돈을 추가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에선 모두 재상영 분배금을 주고 있지만 한국은 제외됐다. 한국에서 제대로 저작권법이 마련되지 않은 점을 악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선 제도적 장치가 적극 마련돼야 한다.

최근 외신들은 K-드라마 다수에 대해 연일 호평을 쏟아 내고 있다. 미국 주간지 옵서버는 ‘마스크걸’에 대해 “대담한 사회 논평을 담은 작품으로, ‘오징어 게임’ 등 다른 한국 드라마들보다 두드러진다”고 극찬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무빙’에 대해 “호소력 짙은 감정적 서사를 지닌 이야기. 탄탄한 스토리가 흥미를 자극한다”고 분석했다. K-드라마가 단순히 흥미와 관심만 끄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까지 인정받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막강한 콘텐츠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한류를 발전시켜 왔다. 이젠 산업 구조와 제도 전체를 재정비하고 보다 크고 탄탄한 K-드라마 열풍을 만들어 갈 때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