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워싱턴인가 : K스트리트 달려가는 기업들]
⑥"G2 편승 없이 개방형 통상 국가로 초일류 강대국 발돋움 해야"
“G2 편승 없이 개방형 통상 국가로 초일류 강대국 발돋움 해야”[왜 워싱턴인가⑥]
반세기 만에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코리아의 앞글자를 딴 ‘K’가 프리미엄을 의미하는 시대다. 하지만 여전히 지정학적 리스크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 관계에서 국가 위치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제 한국은 새로운 역사적 갈림길에 섰다. 강대국에서 다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 평화와 번영을 이끄는 국가로 한 발 더 도약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담은 국가 전략 보고서가 오랜만에 나왔다. 이 보고서가 주장하는 것은 ‘개방형 통상 국가’다.강대국 편승 전략의 한계“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전략적 환경은 위태롭다. 최악의 경우 생존의 갈림길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혁신적이고 선제적인 국가 대전략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국내 싱크탱크인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IFS)이 최근 ‘글로벌과 한국’을 주제로 첫 보고서를 내놓았다. 발간을 맡은 손인주 IFS 부원장(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은 “한국이 개방형 네트워크의 중심으로서 초일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비전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보고서 표제도 ‘강대국 외교 구상 : 한국 주도 동심원 전략’이다.

IFS는 한국이 이제 국력의 변화에 따라 국가의 정체성을 다시 규정하고 새로운 국가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에 직면했다며 강대국으로 부상한 대한민국에는 시민과 국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담론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제안은 미국과 중국 등 주요 2개국(G2)의 전략에 편승하거나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미래상을 정립하는 것이다.

IFS는 구한말 조선의 경험에 빗대 초강대국이 대립하는 현재의 미·중 경쟁 상황에서 초강대국에 대한 무원칙적 편승에만 의존한다면 한국의 국익을 관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폐쇄적인 민족주의 국가 전략보다 개방적 네트워크 국가 전략을 취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선 주변국 정체성에 사로잡혔던 조선왕조 시대에서 탈주해 통일 신라와 고려 시기의 해상 무역과 같이 개방적·진취적 경험을 소환해야 한다고 했다. 더 이상 주변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강대국 편승 전략 등 기존 지배 서사가 만든 함정과 좁은 선택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보이는 폐쇄적 민족주의 성향은 한국이 따라야 할 길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IFS는 “한국은 바닷길을 통한 자유로운 통상과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며 미국·유럽연합(EU)·일본·호주 등 통상의 자유를 중시하는 국가들과 함께 경제적 기회를 확대하는 방향을 주문했다.

IFS의 ‘개방적 네트워크 강대국’의 정체성은 경제 분야에서 글로벌 혁신 중심 전략으로 이어진다. 해외의 기술·인재·자본이 한국에 자유롭게 들어와 산업·과학기술 혁신을 일궈 내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민족 국가 중심적 접근을 버리고 다양한 네트워크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만 세계의 우수 인재를 유치하고 이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들은 글로벌 전략에서 중요한 국제 인적 네트워크가 미국 중심으로 편중돼 있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하며 유럽·아시아(일본·중국·인도·호주)·캐나다 등 다층적으로 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IFS는 국가 매력도 제고를 통해 우수 해외 인력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공유하는 쌍방향적이며 지속 가능한 개방적 네트워크를 미래 한국 사회 발전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과거 한국은 선진국에서 이뤄진 혁신을 따라가는 추격자 전략을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한국 제조업이 후발 국가의 강력한 추격을 받는 현 상황에서는 산업·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추격자 모델에서 발생한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소위 핵심 소재 수입 문제라고 지적했다. 불과 세 개 품목(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불화폴리이미드)에 불과했지만 한국의 중추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 위협을 준 사건이었다. 이에 우리가 가진 강점에 집중해 초일류를 지향하는 선도적 전략으로 전환하는 선도형 혁신 모델을 제안했다. 선도형 혁신 모델이 시급하게 적용돼야 하는 대표적인 과학기술 분야로는 인공지능(AI)과 양자 과학기술을 꼽았다. IFS는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국가 경쟁력을 어떻게 이른 시일 안에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정부 정책에 보이지 않는다”며 “관 주도의 일회성 이벤트를 지양하고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새로운 기술 혁신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단, 반도체와 같이 한국이 우세하고 산업 파급력이 큰 영역은 산업 혁신을 주도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기존 주력 산업(반도체·자동차·배터리·디스플레이·철강·조선 등)들이다.‘제조업+α’ 전략한국을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한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 정책은 이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도 짚었다. IFS는 “지난 50년 동안 제조업 기반의 고도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이 아직도 유효한가”라면서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선택적 다자 주의로 인해 더 이상의 호혜적 시장 개방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제안은 미래 기술을 중심으로 한 산업 혁신으로, 산업 혁신의 양대 조건인 물류·금융의 선진화다. 인도·태평양 중심으로 물류 거점을 확보하고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개방적 네트워크 국가’라는 미래 한국의 국가 정체성에도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IFS는 제조 국가로서의 기술 경쟁력과 제품 경쟁력을 유지해야 하지만 기존의 한국 생산 기반의 수출 주도형 통상 전략으로는 새로운 도약이 쉽지 않아 보인다며 ‘제조업+α’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제안했다. 이들의 세 가지 제안은 첫째,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물류·혁신 플랫 폼을 확보하고 디지털 기술 및 금융 서비스 기반의 글로벌 통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둘째로 미국과 중국 간의 기술 패권 경쟁으로 인해 중국으로부터 이탈하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연구·개발(R&D)센터를 한국에 유치하는 전략을 추진하는 것, 마지막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미국 투자를 시작으로 주요 거점 국가에 제조 인프라와 R&D센터 구축을 보다 전략적이고 능동적으로 추진하는 것 등이다.

혁신을 위해 민간 재단을 확대하라는 제안도 내놓았다. 보고서는 “재단(foundation)을 통해 가업 승계와 부의 상속을 제도화하는 대신 기업 수익금을 재단에 귀속시켜 공익 사업에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록펠러와 게이츠재단을 비롯해 독일 보쉬, 네덜란드 이케아, 덴마크 칼스버그재단 등은 상속 과정에서 형성된 민간 자본이 혁신을 지원한 대표적 사례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원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명예원장을 맡은 IFS는 세계적 수준의 국가 싱크탱크를 목표로 지난해 4월 출범했다. 이번 보고서를 시작으로 내년까지 민주주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과학과 기술의 미래, 경제 안보, 인구, 탄소 중립 등 총 7개 클러스터에서 연구 성과를 담은 국가 미래 전략을 제안할 예정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