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R의 공포, 엔케리트레이드?…블랙먼데이의 막전막후[느닷없는 R의 공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8월 5일 투자자들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기관도 개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8.77% 내린 2441.55에 장을 마쳤다. 장중 한때에는 무려 286포인트(10.8%) 하락했다.

불과 한 달 전 3000선을 노래하던 코스피는 이날 하루 만에 2400선이 깨졌다. 코스피 시장에선 역대 여섯 번째 서킷브레이커(주식매매 일시정지)가 발동됐다. 붕괴였다.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투자전략팀도 기관으로부터 쉴새 없이 밀려드는 ‘증시 긴급 대응 시나리오’ 요청을 받았다. 코스피 하단이 어디일지, 현재 상황에서의 최상과 최악의 시나리오는 어떤지 물어보는 질문들이었다. 이날 최악의 증시는 시장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조차 예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해외주식 시장도 승자가 없었다. 일본 주식시장은 12% 폭락하며 37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해 올해 상승분을 모두 날려버렸고, 미국에서는 주식 변동성을 나타내는 ‘VIX지수’가 사상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8월의 첫째 주 세계 시장을 덮친 건 경기침체의 공포였다. 불과 일주일 전 9월의 금리인하를 논하며 연착륙(소프트랜딩)을 예고했던 시장은 왜 느닷없는 경기침체의 위기에 접어들었을까. 물론 이 흐름에 불을 붙인 건 일본의 급작스러운 금리인상이었다.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R의 공포가 엄습한 배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얽히고설킨 경제 주요 주체들의 장면들을 풀어야만 한다. 시장을 대표하는 ‘투자의 신’ 워런 버핏, AI 버블론을 제기한 월가의 구루들. 금리전쟁의 막을 올린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과 일본은행(BOJ)의 우에다 가즈오 총재. 미 대선을 앞두고 경제 전쟁에 돌입한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공화당의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이 그 주인공이다. #. 늘어난 버핏의 현금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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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일(현지 시간) 버핏이 이끄는 벅셔해서웨이의 2분기 실적이 공개됐다. 앞서 1분기에도 주식을 매각하고 현금 지분을 늘렸던 곳이기에 시장의 관심은 벅셔의 2분기 투자전략으로 향했다. 그리고 벅셔가 보유하고 있던 애플 주식 지분의 절반을 팔아치웠고 이를 통해 현금 보유액을 크게 늘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벅셔의 현금 보유액은 1분기 말 1890억 달러(257조원)에서 2분기 말 2769억 달러(377조원)로, 비중은 17.7%에서 25.0%로 늘었다.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현금 비중이었다(표 참조, 역대 최대 비중은 2005년 2분기 24.5%였다).

앞서 버핏은 1분기 말 애플,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의 주식을 매도하고 현금 보유를 늘린 것과 관련해 기업에 대한 전망이 바뀐 것이 아니라 세금 부담을 우려한 지분 축소라며 정확한 답변을 꺼렸다. 그러나 당시 그는 “모든 주식을 다 사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시장이 좋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가’의 발언은 그가 시장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1분기 버핏의 판단은 2분기 증시의 달콤함에 잊혀졌다. 시장은 상승에 베팅했고 7월 첫 주에는 대형주 중심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가 또다시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미국 경제의 연착륙에 대한 기대감이 증시 상승장의 주요 배경이었다.

2분기 버핏의 투자내역이 공개되자 투자자들은 멈칫했다. 현금 비축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는 ‘오마하의 현인’이 주식시장의 깊은 하락에 대비하고 있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투자자 중 하나인 그가 M7에서 빠져나와 앞으로의 매수기회를 현금으로 쌓는 광경은 투자자들을 불안케 하기 충분했다. 때마침 미국의 경제둔화를 의심하는 시장의 우려가 높아진 시점이었다. 버핏은 미국 경제의 무엇을 미리 내다본 것일까. #. AI 버블론, 탐욕과 공포다시 올초로 돌아가자. 분명 1분기만 해도 성장세를 지속하는 ‘노랜딩 시나리오’가 미국 경제의 미래였다. 시장에서는 연내 금리인하가 없을 수 있다는 예상은 물론 Fed가 금리인상 페달을 다시 밟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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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오브아메리카가 작성한 글로벌 펀드매니저들의 설문 조사는 글로벌 경제 연착륙에 대한 시장의 높은 확신을 보여준다. 올해 1월 노랜딩에 표를 던진 펀드매니저는 7%에 불과했지만 4월에는 36%가 노랜딩 시나리오를 점쳤다. 2분기 들어 그 가능성은 다시 18%로 낮아졌지만 경착륙을 말하는 이는 드물었다. 7월 들어선 68%가 연착륙을 예상했고 경착륙 가능성은 11%에 불과했다.

노랜딩 또는 연착륙을 의심치 않았던 시장에 찬물을 끼얹은 건 다름 아닌 성장에 대한 의심이었다. 2023년부터 세계 증시를 밀어올린 원동력, AI에 대한 ‘버블론’이다.

월가의 구루 중 한 명인 제임스 퍼거슨은 지난 4월 블룸버그 방송에 출연해 AI업계의 의문스러운 약속들로 가득한 과도한 선전 양상이 닷컴 붕괴 이전 시기와 매우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퍼거슨은 “월가의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닷컴 시대의 주요 하드웨어 기업이었던 시스코와 인텔은 줄곧 투자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오늘날 AI 하드웨어의 주역인 엔비디아도 현재의 고평가를 고려하면 비슷한 운명을 겪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놨다.

퍼거슨뿐만이 아니었다. AI 버블론은 월가를 중심으로 수익성 실현에 대한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빅테크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 비용과 기대매출 간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리콘밸리의 최고 벤처투자사 중 하나인 세쿼이아캐피털의 파트너 데이비드 칸은 빅테크 기업의 손실이 올해에만 5000억 달러에 달한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퍼거슨은 이 버블이 언제 끝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투자자들이 주가가 비싸 보일 때조차 시장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낌으로써 버블이 이어진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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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탐욕이 장악한 시장은 매수가 우세했고 S&P500지수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가 사상 최고가를 거듭했다. 미국에서 ‘공포지수’로 불리는 공포와 탐욕 지수(Fear&Greed Index)는 2분기 탐욕과 공포를 넘나들며 시장 심리를 반영했다. CNN비즈니스에서 제공하는 공포탐욕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시장에 공포가 큰 것으로 판단하는데 2분기 시장은 평단 50을 전후로 바쁘게 움직였다. #. ‘슈퍼 트럼프’, 차익실현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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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론에도 기세등등하던 AI에 일격을 가한 건 다름 아닌 미국 대선의 유력주자로 떠오른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7월 18일 “대만이 우리의 반도체 산업을 100% 가져갔다. 대만이 우리에게 방위비를 내야 한다”는 발언으로 아시아 반도체 기업 주가를 한 방에 끌어 내렸다.

이 발언의 여파로 TSMC에 AI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엔비디아까지 영향을 받았다. 엔비디아뿐 아니라 이날 AMD와 브로드컴, 퀄컴 등의 주가도 10% 안팎 떨어졌다. 대만 증시에 상장된 TSMC는 7월 17일과 18일 이틀간 2%가량 주가가 하락했다.

임재균 KB증권 애널리스트는 “두 달여 전부터 미국 기술주에 대한 고평가 부담이 시장에 계속 쌓여 있었다”며 “그런데 트럼프가 대만과 엔저를 걸고 넘어지면서 그때부터 시장에 차익실현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 또한 “최근 높아진 시장 변동성은 전례 없는 시세를 구가했던 빅테크들에 차익실현 압력이 누적된 상황에서 경제적, 정치적 급변기가 함께 찾아옴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차익실현 압박(?)에 이날 나스닥지수는 2.77% 급락하며 2022년 12월 이후 1년 7개월 만에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애플,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 기술주들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AI 열풍을 주도하던 엔비디아 주가는 급락했다가 잠시 반등하는 장세를 거듭하면서 등락이 심하기로 유명한 비트코인보다 변동성지수가 2배나 커지는 등 불안을 더했다.

이경민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시장은 트럼프 피격 이후 잠잠하던 ‘바이든 사퇴론’이라는 불확실성에 반응했다”며 “트럼프 트레이딩에 베팅한 시장 참여자들의 차익실현 및 불확실성 회피가 조정의 트리거가 됐다”고 분석했다. #. 우에다의 수, 엔캐리 청산7월 31일엔 보다 더 큰 폭탄이 터졌다. 일본의 금리인상 소식이었다.

이날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현재 0~0.1%에서 0.25%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3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해제한 이후 4개월 만의 금리인상이자 크나큰 인상폭이었다. 이는 ‘10월 인상’을 점치던 시장 기대를 앞지른 결정이었다. 일본의 경제 전문가 77%는 금리 동결을 예상했다.
R의 공포, 엔케리트레이드?…블랙먼데이의 막전막후[느닷없는 R의 공포]
허를 찌른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금리 결정 이후 질의응답 자리에서 “앞으로의 데이터에 따라 추가 조정이 있을 수 있다”며 향후 정책 금리 수준으로 0.5%를 벽으로 의식하고 있냐는 질문에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이상으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폭탄 발언이었다. 일본은 1999년 제로금리를 도입하고 미국발 금융위기인 리먼사태 직후인 2008년 12월에 0.3% 전후로 정점을 찍은 뒤 2010년대 들어선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했다. 한 번도 0.5%를 넘긴 사례가 없다.

그는 이번 금리인상이 경기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경기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 고용의 발작, R의 공포일본의 금리인상 직후 미국에선 시장을 뒤흔드는 경제지표가 발표됐다. 노동부가 공개한 7월 고용 동향이다. 미 노동부는 지난 7월 실업률이 전월(4.1%) 대비 0.2%포인트 상승한 4.3%로 집계됐다고 8월 2일 밝혔다. 2021년 10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3년 만에 최고치였다. 이 데이터는 노동시장이 실제 약세로 접어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장의 우려를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앞서 6월 미국 실업률이 4.1%로 2021년 이후 처음 4%를 넘겼을 때 시장은 경제 둔화를 의심했다. 같은 시기 소매판매도 전월 대비 0.3% 상승에 그칠 때였다. 하지만 7월 25일 발표된 2분기 미국 경제가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시장의 우려는 불식됐다. 시장은 미국 경기가 여전히 확장세에 있다는 점이 증명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 발표된 고용지표는 이러한 믿음을 박살내기에 충분했다. 시장에서는 미국 경기침체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 중 하나인 ‘삼(Sahm)의 법칙’을 꺼냈다. 이 지표는 Fed의 이코노미스트였던 클로디아 삼이 정립한 법칙으로 미국 실업률의 최근 3개월 평균치가 지난 1년 최저치보다 0.5%포인트 이상 높으면 경기침체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하는데, 7월의 고용동향이 삼의 법칙에 따르면 침체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업률 발표 후 금요일의 주가는 급락했다. 은행주에서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큰 타격을 입었고 국채 수익률은 대부분 4% 아래로 떨어졌다. 월가의 ‘공포지수’인 CBOE 변동성 지수는 올해 들어 가장 높은 수준으로 마감했다. 경기 둔화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반영된 것이었다. #. 일본은행, 7일 만의 전략 수정미국이 기침을 하면 아시아 시장은 독감을 앓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8월 5일 시장은 공포로 물들었다. 우에다 총재는 “(금리인상이) 경기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결과는 ‘대폭락’이었다.

우에다 총재의 강경한 발언과 Fed의 9월 금리인하 전망이 맞물리면서 5일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급등했다. 이날 달러당 141엔까지 하락하며 엔화 강세를 보였고 닛케이225가 12.4% 폭락하는 등 37년 만에 가장 큰 폭의 하락을 경험했다. ‘블랙먼데이’였다. 한국 증시는 영문도 모른 채 폭탄을 맞았다. 미국, 일본은 그동안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오른 것이라도 있지만 한국 증시는 맥을 못 추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했다. 올초 시장의 화두였던 밸류업 같은 얘기는 싹 사라졌다.

다시 글로벌 시장 얘기다.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으로 엔화가 급등하면서 엔화가 낮게 유지될 것이라고 베팅했던 투자자들이 매도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정현종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며칠간 금융시장의 급격한 변화의 배경에는 글로벌 엔캐리 자금의 청산이 있다”며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이 커지고 일본은행이 정책 금리를 올리면서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엔캐리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일본의 엔화를 빌려 달러 또는 새로운 시장의 통화로 바꾼 뒤 그 자금을 해당 국가의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등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대개 상대국은 고금리를 오랜 기간 유지한 미국이었다.

일본은행도 엔고와 증시 폭락에 당황한 듯 보였다. 즉각 금리인상 기조를 틀었다.

세계 시장을 뒤흔든 지 일주일 만인 지난 8월 7일 우치다 신이치 일본은행 부총재는 시장이 불안정할 때는 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우에다 총재와 자신의 생각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라며 “국내외 금융 및 자본시장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해 은행은 현재 정책 금리로 통화 완화 정책을 당분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장을 안심시키는 일본은행 금리정책 설계자의 발언으로 달러 대비 엔화는 떨어지고 일본 증시와 아시아 증시는 상승으로 마감했다. 유럽 증시도 상승 출발하는 등 전 세계 금융시장이 월요일의 하락폭을 상당수 만회했다. (물론, 일본은행의 의도에 여전히 숱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파월과 옐런, 그리고 다시 트럼프일본은행이 금리 방향을 틀면서 시장은 ‘R의 공포’에서 조금은 해방됐다. 애널리스트들도 “변동성이 큰 시기이나 경기침체는 과도한 우려”라는 의견에 무게를 둔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르다. 2024년 최대의 변수 미 대선이 남았다. 시장은 오는 9월 미국 금리인하를 사실상 확정한 분위기이나 유력 대선주자인 트럼프는 대선 이전의 금리인하를 강력 반대하고 나섰다. 11월 대선까지 미국의 금고를 쥐고 있는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변수다. 엔케리트레이드도 최대 변수다.

유명간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시장의 시선은 미국 대선으로 움직일 것”이라며 “당장은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열리는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시장의 핵심 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