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전원합의체 판례 변경
‘정기·일률·고정성’ 중 고정성 기준 제외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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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직자만 받는 조건부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앞서 대법원은 통상임금 포함 기준으로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제시했으나 이번에 기준에서 ‘고정성’을 제외해 11년 만에 종전 판례를 변경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인건비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분석된다. 추가 임금 소송도 급증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하급심 판단 엇갈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024년 12월 19일 한화생명보험과 현대자동차 전현직 근로자가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 선고 기일을 열고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통상임금 기준에서 ‘고정성’ 기준을 폐기하는 것으로 판시했다.

두 사건은 모두 재직자 조건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통상임금은 ‘소정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금품’으로 통상임금이 오르면 근로자가 받을 수 있는 수당, 퇴직금 등도 오르게 된다.

앞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자동차 부품업체인 갑을오토텍 사건에서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선고했다.

재직조건 및 근무 일수 조건부 임금, 근무실적 평가를 토대로 지급 여부나 지급액이 정해지는 임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별도 기준도 함께 제시했다. 이 같은 조건이 붙었다면 통상임금의 성립 요건인 ‘고정성’(추가 조건과 관계없이 지급이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란 취지였다.

하지만 한화생명보험 전현직 근로자들은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하는 정기상여금과 성과급 최소지급분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며 법정 통상임금을 기초로 재산정한 시간외근무수당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 근로자들도 “‘기준 기간’ 내 15일 미만 근무한 경우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건이 붙은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며 이를 통상임금에 넣어 재산정한 연장근로수당 등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여기서 기준기간이란 상여금의 지급 주기인 2개월, 약 6개월, 약 1년 등이다.

하급심 판단은 엇갈렸다. 서울고법은 2020년 한화생명보험 사건 2심에서 “재직자 조건은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미 근로의 대가로 발생한 임금에 재직자 조건이 붙었다는 이유로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반면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은 현대차 사건에 대해 “기준 기간 내에 15일 미만 근무하면 정기상여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지급 조건은 무효”라며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사건마다 엇갈린 판단이 나오자 산업계와 법조계에서도 혼란이 이어졌다.

이에 대법원은 2020년 두 사건과 쟁점이 비슷한 세아베스틸 사건을, 올해 9월엔 두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전원합의체는 종전 판례가 제시한 ‘고정성’ 개념을 통상임금의 개념적 징표로 계속 유지할 것인지를 심리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통상임금의 개념과 판단 기준’을 어떻게 재정립해야 할지를 따져봤다.

11년 만에 ‘고정성’ 조건 삭제

전원합의체는 ‘고정성’을 통상임금의 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새로운 법리에 따라 재직 조건부 임금이나 근무 일수 조건부 임금 모두 이러한 조건이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수 없게 됐다.

대법원은 “‘고정성’은 통상임금에 관한 정의 규정인 근로기준법 시행령 제6조 제1항을 비롯한 법령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며 “법령상 근거 없이 ‘임금의 지급 여부나 지급액의 사전 확정’을 의미하는 고정성을 통상임금의 개념적 징표로 요구하는 것은 통상임금의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시킨다”고 지적했다.

이어 “통상임금은 ‘소정근로의 가치’를 평가한 개념이므로 실근로와 무관하게 소정근로 그 자체의 가치를 온전하게 반영해야 한다”며 “법정수당 산정을 위한 도구 개념이므로 연장근로 등을 제공하기 전에 산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통상임금은 연장·야간·휴일근로를 억제하려는 근로기준법의 정책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원합의체는 이번에 ‘고정성’을 제외하는 대신 통상임금의 본질인 ‘소정근로 대가성’을 중심으로 통상임금 개념을 재정립했다.

전원합의체는 “근로자가 소정근로를 온전하게 제공하면 그 대가로서 정기적, 일률적으로 지급하도록 정해진 임금은 그에 부가된 조건의 존재 여부나 성취 가능성과 관계없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성과급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정근로의 대가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다만 근무실적과 무관하게 지급되는 최소 지급분은 소정근로의 대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새로운 법리는 통상임금의 본질인 소정근로의 가치를 온전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요청과 도구 개념으로서 요구되는 사전적 산정 가능성을 모두 충족한다”며 “재직 조건부 임금뿐 아니라 근무 일수 조건부 임금 등 다양한 임금 유형에 정합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명확한 지침”이라고 밝혔다.


[돋보기]
“기업 인건비 부담 연 약 7조원 증가할 것”

대법원은 법적 안정성과 신뢰 보호를 위해 새로운 통상임금 법리는 판결 선고일 이후 산정하는 통상임금부터 적용하도록 했다. 다만 이번 사건 선고 시점 현재 법원에 동일 쟁점으로 계속 중인 사건(병행 사건)에 대해서는 소급해 적용하기로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례변경이 갖는 막대한 파급효과와 종전 판례 법리에 대한 신뢰보호를 고려해 판례변경의 취지를 미래지향적으로 살리면서도 당사자의 권리구제도 배려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이 산업계에 미칠 영향도 클 전망이다. 앞서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재직자 조건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산입될 경우 연간 6조7889억원의 추가 인건비를 기업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대부분 기업은 그동안 종전 판례를 준용해 ‘특정 시점 재직’ 또는 ‘특정 일수 이상 재직’ 조건을 달아 상여금 등 임금체계를 마련해 왔다. 삼성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SK, 현대차, LG, 롯데 등 대부분 대기업은 고정성 요건으로 상여금 지급 여부를 조절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그동안 기업들은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라 조건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해 총인건비를 계산해왔다”며 “이번 판결로 당장 내년부터 임금인상률이 크게 조정될 전망”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쟁점이 유사한 추가 임금 소송이 속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 이후 고용노동부도 임금을 소관하는 부서 등에서 통상임금 관련 행정지침(해석)을 변경해 고용부 전반에 변경된 지침이 반영될 전망이다.

고용부가 현재 현장에 적용하는 통상임금 노사 지도 지침은 종전 판례를 바탕으로 2014년 1월에 마련됐는데 고용부는 이번 판례를 분석하고 전문가 의견 등을 종합해 지침을 변경·보완할 계획이다.

고용부는 또 사업체 노동력 조사, 임금 결정 현황 등 고용부에서 진행하는 각종 통계 조사 관련 부분에서도 변경된 판례를 반영할지 검토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서 판례변경의 소급효를 제한했지만 새로운 법리의 적용 여부 등이 모호한 케이스도 있을 수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며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 시일 내 지침을 개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